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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가 지우려 한 기록 2만 쪽: 냉전 정신조작 실험 MK울트라

1953년 11월의 어느 저녁, 미국 메릴랜드주 딥크리크 호수의 한 산장에 미 육군과 중앙정보국(CIA) 소속 연구자 몇 명이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육군 생물학전 연구소의 세균학자 프랭크 올슨이 있었습니다. 그가 마신 술잔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강력한 환각제 LSD가 섞여 있었습니다. 며칠 뒤 올슨은 극심한 정신적 혼란에 빠졌고, 아흐레 만에 뉴욕의 한 호텔 창문에서 떨어져 숨졌습니다. 정부는 오랫동안 이 죽음을 자살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술잔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후 20년 넘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 건물.
MK울트라를 승인하고 운영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 사진: CIA image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실험의 이름은 ‘프로젝트 MK울트라(Project MKUltra)’였습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CIA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지를 은밀히 파고든 인간 대상 실험 계획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 실험이 무엇을 노렸고, 어떻게 실패했으며, 파묻힐 뻔한 기록이 어떻게 다시 드러났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블로터 종이 형태의 LSD.
MK울트라가 심문 목적으로 가장 집중적으로 시험한 환각제 LSD(사진은 블로터 종이 형태). 사진: DickStuert · CC BY-SA 4.0 · 출처 Wikimedia Commons

냉전의 공포가 낳은 ‘행동통제’ 계획

MK울트라는 1953년 4월 13일 CIA 국장 앨런 덜레스의 승인으로 공식 출범했습니다(위키백과). 배경에는 냉전 특유의 불안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 일부가 적국에 유리한 진술을 하고 돌아오자, 미국 안에서는 소련이나 중국이 이른바 ‘세뇌’ 기술을 확보한 것이 아니냐는 공포가 번졌습니다. CIA는 상대가 그런 기술을 가졌다면 자신들도 알아내야 한다고 판단했고,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비밀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실무는 CIA 기술지원과가 맡았고, 화학자 시드니 고틀리브가 계획을 이끌었습니다. 미 육군 생물학전 연구소가 있던 포트 디트릭과도 협력했습니다. 목표는 심문에서 진실을 끌어내거나, 상대를 무력화하거나, 기억과 판단을 교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은 하나의 실험이 아니라 우산처럼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갔습니다. 자료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략 150여 개의 하위 프로젝트에 자금이 지원됐고, 군을 제외하고도 80곳이 넘는 대학·병원·교도소·제약회사 등이 연구에 동원됐습니다(위키백과). 추정 예산은 약 1,000만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8,700만 달러 수준으로 추산됩니다.

LSD, 최면, 감각 차단 — 무엇을 시험했나

MK울트라가 가장 공을 들인 물질은 LSD였습니다. 당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이 강력한 환각제가 심문이나 자백 유도에 쓰일 수 있는지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1953년 CIA가 상당량의 LSD를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규모가 약 24만 달러에 이르렀다는 서술도 있습니다. 다만 이 수치는 자료마다 편차가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LSD 외에도 메스칼린 같은 향정신성 약물, 최면, 감각을 차단한 채 고립시키는 방법, 전기충격 등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위키백과).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이런 약물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몰래 투여한 실험이었습니다. 실험 대상에는 병원 환자, 수감자,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시민도 포함됐습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약단속국 요원 조지 화이트가 운영한 안전가옥에서, 시민에게 몰래 약물을 투여하고 그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 연구 전반은 대학과 병원의 이름을 빌린 위장 형태로 진행돼, 정작 실험에 참여한 기관조차 자금의 출처가 CIA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CIA는 원하던 ‘마음을 조종하는 기술’을 손에 넣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중문화가 그린 것처럼 명령 한마디로 움직이는 세뇌된 인간을 만들어 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계획을 이끈 고틀리브 본인이 훗날 조사위원회에서, 들인 비용과 위험에 비하면 성과가 높은 계획은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LSD를 이용한 심문 역시 성공만큼 실패도 많았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었습니다(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 MK울트라는 무시무시한 성공담이 아니라, 방대한 자원을 쏟고도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한 실패한 실험에 가깝습니다.

포트 디트릭 입구 표지.
프랭크 올슨이 근무했고 CIA와 협력한 미 육군 생물학전 연구소가 있던 포트 디트릭. 사진: unknown U.S. Army photographer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프랭크 올슨의 죽음, 풀리지 않은 물음

MK울트라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앞서 언급한 프랭크 올슨입니다. 1953년 11월 19일 딥크리크 호수의 수련회에서 고틀리브와 그의 부관은 올슨을 비롯한 참석자들에게 LSD를 본인도 모르게 투여했습니다. 올슨은 이후 심한 불안과 혼란에 시달렸고, 아흐레 뒤인 11월 28일 새벽 뉴욕의 스탯틀러 호텔 객실 창문에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위키백과).

정부는 이 사건을 처음에는 자살로, 이후 사고로 처리했습니다. 진실의 일부가 드러난 것은 1975년입니다. 요원을 대상으로 한 은밀한 약물 실험이 조사 과정에서 공개되면서 올슨 사건이 다시 조명됐습니다. 유족은 75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당시 CIA 국장 윌리엄 콜비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았습니다(위키백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4년 올슨의 아들 에릭의 요청으로 시신이 발굴되어 2차 부검이 이뤄졌습니다. 법의학자는 두부의 손상 등을 근거로 이 죽음이 단순한 추락으로 보기 어렵다는 소견을 냈고, 뉴욕 검찰은 사인 분류를 ‘자살’에서 ‘미상’으로 바꿨습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해 둘 점이 있습니다. 올슨이 누군가에게 살해됐다고 확정된 바는 없으며,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도 없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은,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
1975년 CIA의 인간 대상 실험을 조사한 상원 특별위원회를 이끈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 사진: United States Senate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파기된 기록과 살아남은 2만 쪽

MK울트라가 오래 묻혀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973년,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는 고틀리브와 함께 MK울트라 관련 기록의 대부분을 파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보기관을 향한 감시의 눈이 매서워지던 무렵이었습니다(위키백과). 이 때문에 오랫동안 “모든 기록이 사라져 진실은 영영 묻혔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파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산과 회계 관련 문서 약 2만 쪽이 별도의 기록보관소에 잘못 분류된 채 살아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서 뭉치는 1977년 CIA 국장 스탠스필드 터너에 의해 공개됐고, 연구자 존 마크스의 정보공개 청구가 그 계기가 됐습니다. 태우려 했던 계획의 윤곽은 바로 이 ‘살아남은 2만 쪽’을 통해 다시 그려질 수 있었습니다(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

폭로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언론이었습니다. 1974년 12월 22일 기자 시모어 허시가 뉴욕타임스에 CIA가 미국 시민을 상대로 벌인 불법 활동을 보도하자, 의회가 움직였습니다. 1975년 1월 상원은 82대 4의 압도적 표결로 정보 활동을 조사할 특별위원회, 이른바 처치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같은 해 여름 처치위원회와 대통령 직속 록펠러위원회는 CIA의 인간 대상 실험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처치위원회·록펠러위원회 보고서).

폭로가 남긴 것

처치위원회의 결론은 냉정했습니다.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로부터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단은 이후의 제도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서면과 제3자의 입회 아래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인체 약물 실험을 금지했습니다(위키백과). 오늘날 의학 연구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은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가 이런 반성 위에서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그 원칙의 밑바닥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실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하게 지어진 존재라는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MK울트라 이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자극적이어서가 아닙니다. 국가 기관이 시민을 상대로 은밀한 실험을 벌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감춰졌다는 사실이 던지는 물음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다른 면도 보여 줍니다. 언론의 보도, 의회의 조사, 정보공개 청구, 그리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은밀한 오용이 결국 공적 절차를 통해 드러나고 바로잡히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입니다.

파기하려 했던 기록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2만 쪽은 감춰졌던 계획의 윤곽을 되살렸습니다. 프랭크 올슨의 죽음처럼 끝내 답이 나오지 않은 물음도 남아 있습니다. MK울트라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완성된 정신조작 기술이 아니라, 견제받지 않는 비밀 권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교훈입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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