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예순아홉 마리가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릅니다. 둥근 고리 안의 학들은 위를 향하고, 고리 밖의 학들은 아래를 향합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의 표면에 새겨진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 학과 구름은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도공이 그릇 표면을 일일이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의 흙을 다시 메워 만든 무늬입니다. 흙을 깎아내고 또 다른 흙으로 채운다는, 언뜻 번거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발상이 어떻게 12세기 고려를 대표하는 예술이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비색이라 부른다” —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푸른빛
고려청자의 출발점은 모방이었습니다. 중국 오월(吳越)의 청자를 굽던 월주요(越州窯)의 기술을 받아들여, 대략 10세기 초경부터 고려에서도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늬가 거의 없고 색도 다소 어두운 청자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도공들은 기술을 단순히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작은 진흙 가마로 불의 온도를 섬세하게 조절하고, 유약을 두껍게 입혀 다시 구워내면서, 마침내 옥(玉)을 닮은 청록색의 반투명한 유약을 완성했습니다.
이 푸른빛의 명성은 국경을 넘었습니다. 1123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자기 나라의 도자 전통에 자부심이 컸을 중국 관리가 고려청자의 색을 직접 칭찬한 기록입니다. 비색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흙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 — 상감(象嵌)의 탄생
비색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고려 도공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12세기 중엽 무렵, 청자 표면에 무늬를 새겨 넣는 ‘상감(象嵌)’ 기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상감이란 본래 금속공예에서 쓰던 말로, 기물 표면에 금·은·자개 같은 다른 재료를 박아 넣어 무늬를 내는 장식법을 뜻합니다. 고려 도공들은 이 발상을 흙으로 옮겨왔습니다. 위키백과 등은 나전칠기에서 힌트를 얻었을 가능성을 거론하고, 흙을 파내고 다른 흙을 메워 무늬를 내는 발상 자체는 동아시아 다른 공예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이를 청자에 결합해 독자적인 미감으로 끌어올린 것은 고려 도공들의 성취였습니다.
과정은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그릇을 빚어 반쯤 마른(반건) 상태가 되면, 조각칼로 표면에 무늬를 음각(陰刻)합니다. 그다음 파낸 홈에 흰 흙(백토)이나 붉은 흙(자토)을 붓으로 메웁니다. 흙이 마른 뒤 표면에 덧묻은 흙을 깎아내면, 음각한 부분에만 흙이 남아 무늬가 또렷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무늬를 채운 그릇을 완전히 말려 초벌구이를 하고, 그 위에 청자유(靑瓷釉)를 입혀 다시 굽는 재벌구이로 마무리합니다.
백토는 흰색, 자토는 검은색
여기에 상감청자의 묘미가 있습니다. 가마 속 높은 열을 견디고 나면 백토는 흰색으로, 붉은 자토는 검은색으로 발색됩니다. 그리고 그 무늬가 투명한 청자유를 통해 은은하게 비쳐 떠오릅니다. 앞서 본 운학문 매병이 좋은 예입니다. 검은 동심원 고리는 자토를 메운 것이고, 하얀 학과 구름은 백토를 메운 것입니다. 흙의 종류에 따라 색이 갈리는 이 원리를 실물 국보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셈입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기법을 두고 “동양도자사에 있어서 획기적이라 할 만한 창조적 기법”이라 평가합니다.

강진과 부안, 전성기를 빚어낸 가마
이 정교한 작업은 아무 데서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려청자 제작지는 중기에 전라남도 강진군과 전라북도 부안군 일대로 집중되었습니다. 특히 강진군 대구면 일대(사당리·용운리 등)의 요지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용운리 가마는 10~11세기의 초기 요지이고, 사당리는 12세기 전반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것이 가장 많습니다. 청자가 발전하고 무르익은 흐름이 가마터에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강진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심지가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일대였습니다. 이곳의 청자 요지 역시 별도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13세기 전반에는 부안에서 더 많은 청자가 생산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앞서 살펴본 간송미술관 국보 매병도 바로 이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높이 42.1cm의 이 매병은 고려 12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분류되며, 일제강점기에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유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오래 ‘국보 제68호’로 불렸지만, 2021년 11월 19일부터 국가유산청이 국보·보물의 지정번호를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하면서 지금은 번호 없이 명칭만으로 표기합니다. 지정번호가 문화재를 서열화한다는 인식과 일제가 매긴 번호라는 비판이 폐지의 배경이었습니다.

쇠퇴, 그리고 분청사기로 이어진 흐름
모든 전성기에는 끝이 있습니다.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에 걸쳐 고려청자는 쇠퇴기에 접어듭니다. 몽골(원)의 침입과 지배가 이어지면서 전통 청자는 위축되었고, 유약은 비색을 잃고 황록색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정교하던 상감 무늬도 점차 산만하고 조잡해졌으며, 같은 무늬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 기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고려 말 쇠퇴한 상감청자는 조선 초로 이어지며 분청사기로 변모·발전했습니다. 유학을 중심에 둔 새 통치층이 화려한 그릇보다 검소하고 실용적인 그릇을 선호한 흐름과 맞물려, 분청사기는 조선 태종 때부터 약 200여 년간 유행했습니다. 청자의 푸른 유약은 흐려졌지만, 흙을 파내고 메워 무늬를 내던 발상만큼은 다음 시대로 건너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것
국립중앙박물관은 2012년 ‘천하제일 비색청자’ 특별전을 열어 국보 18점, 보물 11점 등 대표 명품 청자를 한자리에 선보였습니다. 1989년 이후 23년 만의 대규모 전시였습니다. 매병 한 점 앞에 서서 학 예순아홉 마리를 헤아릴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옛 그릇이 아닙니다. 남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흙을 파내고 다시 메우는 번거로운 길을 택해 끝내 자기만의 미를 완성한 어느 시대의 집요함입니다. 비색이라는 색 이름 하나, 학이 떠오르는 매병 한 점에 그 집요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