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 본토 상륙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공포가 런던을 짓누르던 그 순간, 대서양 건너편 캐나다 핼리팩스 항에는 낡은 순양함 한 척이 조용히 닻을 내렸다. 갑판 아래에는 신문지에 싸인 상자와 궤짝이 가득했다. 안에 든 것은 무기도 병력도 아니었다. 영국이 가진 금괴와 유가증권, 즉 나라가 전쟁을 계속 치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마지막 밑천이었다. 훗날 “물고기 작전(Operation Fish)”이라 불리게 되는 이 은밀한 수송은, 한 나라의 재정 자산을 통째로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옮긴,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작전이었다고 여러 매체는 평가한다.

Royal Navy official photographer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배경 — 유가증권 등록에서 침공의 그림자까지
물고기 작전의 뿌리는 처칠이 총리가 되기 훨씬 전인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9월, 영국 정부는 자국민이 해외에 보유한 유가증권을 재무부에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했고, 1940년 초에는 비상권한법(Emergency Powers Act)에 따라 민간 보유 증권의 등록과 징발 범위를 한층 넓혔다. 캐나다에 금을 예치해 두는 관행 자체도 1936년 무렵부터 이미 존재했는데, 1939년 5월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캐나다 순방 편에는 애초 순양전함 리펄스(Repulse)가 금괴를 실어나를 예정이었으나 중도에 임무에서 빠졌고, 이름이 명확히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두 척이 대신 실어날라 전쟁 발발 전 첫 대규모 선적을 이뤘다(선적 규모는 자료마다 “약 50톤, 1,400만 파운드”부터 “3,000만 파운드, 상자 2,229개”까지 편차가 있다). 그해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한 뒤, 10월에는 HMS 에메랄드가 최초의 전시 호송 선적을 싣고 핼리팩스에 도착하며 이송은 이미 소규모로 이어지고 있었다.
전환점은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이었다. 처칠 정부는 “설령 영국 본토가 점령되더라도 대영제국이 어딘가에서는 항전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국가 자산의 대서양 이송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즉 처칠은 이 작전을 처음부터 발안한 인물이라기보다, 1940년 5월 10일 총리로 취임한 뒤 이미 진행 중이던 소규모 이송을 전시 국가 생존 전략의 핵심 축으로 끌어올려 대폭 가속화한 정치적 결정권자였다.
대서양을 건넌 금괴 — 작전의 전개
1940년 6월 24일, HMS 에메랄드는 스코틀랜드 그리녹항을 출항해 유가증권을 싣고 대서양으로 나섰다. 약 4,600㎞의 항해 끝에 7월 1일 캐나다 핼리팩스 항에 닿았다. 이후 7월 중순에는 5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호송선단이 금괴 약 1억 9,200만 파운드어치와 수억 파운드 규모의 유가증권을 함께 실어날랐다. 이송에 동원된 선박은 HMS 에메랄드(초기 함장 오거스터스 아가, 이후 프랜시스 플린), HMS 레벤지, HMS 엔터프라이즈, HMS 캐러독, HMS 보너벤처, HMS 퓨리어스, HMS 레절루션과 SS 안토니아, SS 더치스오브리버풀, 모나크오브버뮤다, SS 소비에스키, SS 바토리 등으로 캐나다 히스토리(Canada’s History)는 기록하고 있다.
이 항해는 결코 안전한 뱃길이 아니었다. 포브스(Forbes) 보도에 따르면 1940년 5월 한 달에만 연합군·중립국 상선 100여 척이 격침됐을 만큼, 이 시기 북대서양 항해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1917년 SS 로렌틱 호가 아일랜드 인근에서 독일 기뢰에 격침돼 금괴 3,211개(약 43톤, 당시 500만 파운드 상당)를 잃고 354명이 목숨을 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사는, 물고기 작전을 설계한 이들에게 두고두고 반면교사로 인용됐다. 이런 위험 속에서도 다수 출처는 물고기 작전의 호송선단 가운데 적의 공격으로 금이나 증권을 실은 배가 격침된 사례는 없었다고 공통적으로 서술한다.
작전 전체를 통해 캐나다로 이송된 금의 총량은 출처마다 “1,500톤 이상”(다수 출처) 또는 “거의 2,000톤”(뱅크오브캐나다박물관)으로 엇갈린다. 이는 이송이 여러 해에 걸쳐 여러 차례 이뤄졌고, 순금괴만 집계했는지 주화까지 포함했는지 등 집계 기준이 자료마다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폐가치 환산액 역시 “영란은행에서 나간 금만 4억 7천만 파운드 이상(2014년 기준 약 670억 달러)”이라는 서술부터 “작전 전체를 통해 2017년 달러 기준 약 1,600억 달러가 이송됐다”(뱅크오브캐나다박물관)는 서술까지 계산 연도와 포함 항목에 따라 크게 갈리므로, 단일 숫자로 못박기보다 범위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왜 “Fish”였나 — 암호명의 유래
1940년 7월 2일, 몬트리올의 보나벤처 역에서 캐나다 외환관리위원회 소속 시드니 퍼킨스(Sidney Perkins)가 영국은행 측 인사 알렉산더 크레이그(Alexander Craig)를 마중 나갔다. 이때 크레이그가 “상당량의 생선(fish)을 싣고 왔다”고 말한 데서 훗날 이 작전을 가리키는 암호명 “Fish”가 유래했다는 일화는 뱅크오브캐나다박물관을 비롯해 War History Online, Fairview Historical Society 등 여러 출처에서 동일하게 반복돼 교차 확인된다. 금과 증권을 실은 화물을 “생선”이라는 평범한 단어로 에둘러 부른 이 표현은, 항구 부두에서 오간 짧은 대화가 어떻게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오타와의 금고, 몬트리올의 지하 요새
핼리팩스에 도착한 금과 증권은 캐나다국유철도(Canadian National) 특별열차에 실려 무장 호위를 받으며 몬트리올을 거쳐 오타와로 이송됐다. 열차 운송비만 캐나다국유철도에 100만 달러 이상 지불됐을 정도였다. 금괴 실물은 오타와 웰링턴가의 캐나다은행 금고에 보관됐고, 유가증권과 현금성 자산은 몬트리올 선라이프(Sun Life) 빌딩 지하 3층에 새로 지은 금고로 향했다.
선라이프 금고는 지상에서 약 15m 아래, 폐선된 철도 궤도의 강철을 재활용해 벽 두께 약 0.9m(3피트)의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고, 서랍 여닫는 소리까지 감지한다는 초민감 마이크까지 설치돼 있었다. 금고 문은 로열뱅크오브캐나다에서 빌려온 것이었고, 4단 서류 캐비닛 900개가 유가증권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곳에는 캐나다 왕립기마경찰(RCMP) 요원 약 24명이 상시 배치돼 24시간 경비를 섰고, 은퇴한 은행원·증권중개인·비서 등 약 120~130명이 비밀유지 서약 아래 고용돼 증권을 기록하고 관리했다. 정작 이 건물에서 일하던 약 5,000명의 직원 대다수는 자기 발밑 지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전혀 몰랐고, “영국 왕실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식의 소문만 떠돌았다고 한다. 애크리스오브스노(Acres of Snow)에 따르면 작전에 관여한 인력은 선박·부두 인력까지 포함하면 600명을 훌쩍 넘었지만, 종전 후까지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았고 영국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누가 이 작전을 움직였나
물고기 작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처칠의 이름이 앞세워지지만, 실제 구도는 조금 더 복잡하다. 처칠은 총리로서 국가 자산의 대규모 대서양 이송을 승인하고 밀어붙인 정치적 결정권자였다. 캐나다 히스토리 기사에 따르면 처칠은 이 자산이 없었다면 영국이 전쟁 수행 비용을 감당할 수단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로 언급했다고 하는데, 다만 이 발언의 정확한 출처(연설문이나 회고록 등)가 해당 기사에 명시돼 있지는 않다. 반면 실제로 배를 지휘하고 호송을 편성하며 자산을 인수인계한 것은 처칠이 아니라 현장 실무진이었다. HMS 에메랄드 함장 오거스터스 아가와 그를 브리핑한 랜슬럿 홀랜드 해군소장 등 해군 장교들이 항해를 맡았고, 1920년부터 영란은행 총재를 지낸 몬터규 노먼(Montagu Norman)이 영국 측 의사결정에 관여했다. 영국은행 측 실무는 알렉산더 크레이그가, 캐나다 측 수령 실무는 캐나다은행의 데이비드 맨서(David Mansur)와 시드니 퍼킨스가 맡았고, 캐나다은행 총재 그레이엄 타워스(Graham Towers)가 이를 총괄했다. 요컨대 처칠 정부가 승인하고 가속화한 결정을, 영란은행과 해군, 캐나다은행의 실무진이 손발이 되어 실행에 옮긴 구조였다.
무사히 도착하지 못한 금 — 에밀 베르탱 호의 예외
모든 화물이 목적지에 안전하게 닿은 것은 아니었다. 1940년 6월, 프랑스 순양함 에밀 베르탱(Émile Bertin) 호는 프랑스의 금 약 254톤(캐나다은행 추산 약 3억 500만 달러 상당)을 싣고 캐나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해 도중 프랑스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함장은 항로를 바꿔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로 우회했다. 이 프랑스 금은 결국 캐나다(오타와)에 도착하지 못했다. 따라서 “물고기 작전 선단이 한 척도 잃지 않았다”는 서술은 정확히 말하면 영국에서 출발해 캐나다로 향한 선단에 국한된 이야기이며, 에밀 베르탱 호의 프랑스 금은 침몰이 아니라 자체 항로 변경으로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별개의 사례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전후 — 자산은 어떻게 쓰였나
캐나다로 옮겨진 자산은 단순히 안전하게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41년 3월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이 시행되기 전까지, 미국 중립법(Neutrality Act)은 영국이 무기와 군수물자를 오직 현금으로만, 그것도 자국 선박으로 실어가는 방식으로만 살 수 있게 했다. 신용거래(외상)가 철저히 금지된 이 시기에 금과 달러를 확보해 두는 일은 영국의 전쟁 수행에 사실상 생명줄이었고, 포브스 역시 같은 ‘현금 즉시 구매(cash-and-carry)’ 배경을 별도로 확인하고 있다. 몬트리올에 보관된 유가증권은 이후 수년에 걸쳐 뉴욕증권거래소 등에서 순차적으로 매각돼 전비 조달에 쓰였지만, 정확히 얼마가 언제 매각됐는지는 기록이 불완전해 총 매각 규모는 알 수 없다고 캐나다 히스토리 기사는 밝히고 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캐나다은행이 최종적으로 보관한 금은 약 400온스짜리 금괴 186,332개에 더해, 주화 등 기타 형태로 800만 온스 이상이었다고 집계된다. 이 최종 보관량은 1940년 물고기 작전 한 차례의 이송분만이 아니라, 종전까지 여러 해에 걸쳐 프랑스 등 다른 나라가 추가로 맡긴 금까지 누적된 수치여서, 앞서 언급한 물고기 작전 자체의 이송량(1,500톤 이상~거의 2,000톤)보다 범위가 더 넓다. 실제로 종전 후에도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는 오타와에 맡긴 금 계좌를 계속 유지했고, 일부는 1945년 이후 오히려 예치량을 늘리기도 했다. 프랑스가 맡긴 금괴 10,581개는 종전까지 캐나다 정부 결정에 따라 동결 상태로 유지됐다.

의의
물고기 작전은 흔히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물리적 자산 이동”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이는 학술적으로 엄밀히 검증된 절대 기록이라기보다 뱅크오브캐나다박물관, War History Online을 비롯한 여러 대중 역사 매체가 반복해서 사용해 온 수사에 가깝다. 다만 그 표현을 걷어내고 사실관계만 놓고 보아도, 한 나라가 자국의 금과 유가증권 대부분을 적의 잠수함이 우글거리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옮기고, 그 사실을 종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친 사례는 흔치 않다. 처칠 정부의 결단과 영란은행·캐나다은행 실무진의 손발이 맞아떨어진 이 작전은, 영국이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도 항전을 이어갈 재정적 밑천을 지켜낸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뒷이야기로 남아 있다.
참고 자료
- Bank of Canada Museum: Operation Fish
- Canada’s History: Guarding the Gold
- The Historical Society of Ottawa: Operation Fish
- War History Online: Operation Fish
- Fairview Historical Society: Operation Fish
- Acres of Snow: Operation Fish
- Forbes: Gold, World War II And Operation Fish
- Wikipedia: Operation Fish
- Wikipedia: Montagu Norman, 1st Baron No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