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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챔버: 위장 회사 간판 뒤에서 외국 암호를 풀던 미국 최초의 평시 암호국

1919년 여름, 뉴욕 5번가에서 모퉁이를 돌면 바로 나오는 이스트 38번가 3번지의 4층짜리 브라운스톤(갈색 사암) 건물에 한 회사가 들어섰다. 이름은 ‘코드 컴파일링 컴퍼니(Code Compiling Company)’. 자료에 따라 앞에 ‘유니버설’을 붙이기도 하는 이 회사는 은행과 기업에 상업용 전신 부호책을 만들어 파는 곳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미국 정부가 몰래 세운 암호해독 기관의 위장 간판이었다. 직원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비밀 장부에서 현금으로 급여를 받는 민간인이었고, 집세와 전화요금까지 정부와 연결되지 않게 따로 치렀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크롬웰 인터내셔널). 훗날 ‘블랙 챔버(Black Chamber)’로 알려진 이 조직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은 미국 최초의 평시 암호해독 기관이었다(영문 위키백과). 이 조직은 일본 외교 암호를 풀어 군축 협상을 미국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1929년 문을 닫은 뒤, 책임자가 쓴 폭로 책 한 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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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 넓게 벗어진 정장 차림 남성의 흑백 상반신 사진
허버트 O. 야들리. 1917년 육군 암호과 MI-8을 맡았고, 1919년부터 1929년까지 블랙 챔버를 이끌었다.
사진: 미국 국가안보국(NSA)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기원 — 1차 대전이 만든 암호과 MI-8

이야기는 한 전신 직원에게서 시작한다. 허버트 O. 야들리(Herbert O. Yardley)는 1889년 인디애나주 워딩턴에서 태어나 철도 역장이자 전신기사였던 아버지에게 전신을 배웠다. 1912년 공무원 시험에 붙어 국무부 암호실 직원이 됐다. 야간 근무 때 미국 정부의 암호 전보를 풀어 보던 그는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측근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이 주고받은 500단어짜리 암호문을 2시간이 안 돼 풀었다고 훗날 주장했다. 미국 암호가 이렇게 허술하다는 데 놀란 그는 100쪽짜리 보고서 ‘미국 외교 암호의 해법’을 써서 상관에게 냈다(영문 위키백과,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1917년 4월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야들리는 육군으로 옮겼다. 그해 6월 통신단 예비역 장교로 임관했고, 육군 군사정보국에 새로 생긴 제8과, 곧 암호를 맡은 ‘MI-8’의 책임자가 됐다(영문 위키백과,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처음에는 암호를 모르는 조수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MI-8은 곧 암호 작성, 통신, 속기, 비밀 잉크, 암호 해독의 다섯 부서에 150명 넘는 인원을 둔 조직으로 커졌다. 야들리는 한때 일주일에 편지 2,000통 넘게 비밀 잉크 검사를 했다고 적었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1918년 멕시코 국경에서 붙잡힌 독일 공작원 로타어 비츠케의 옷에서 나온 암호문을 풀어 그의 사보타주 활동을 밝힌 것도 MI-8이었다(영문 위키백과, 크롬웰 인터내셔널).

'OFFICE OF CABLE CENSOR'라는 제목 아래 날짜, 발신지 페트로그라드, 수신지 뉴욕과 로마자로 옮긴 러시아어 번역문이 타자된 서식
1917년 11월, 전신 검열관이 웨스턴유니언 전보 한 통을 야들리의 암호 부서로 보내 번역을 맡긴 서식. 페트로그라드가 뉴욕에 패커드 자동차와 부품을 서둘러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자료: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전쟁이 끝나도 남은 조직 — 1919년의 암호국

종전 뒤 MI-8은 흩어질 처지였다. 1919년 4월 유럽에서 돌아온 야들리는 ‘민간인 암호 전문가와 직원을 붙잡아 둘 돈이 없었다’고 회고했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그는 군사정보국장 말버러 처칠 준장을 움직여, 육군과 국무부가 함께 돈을 대는 상설 암호 기관을 만들자는 안을 올렸다. 1919년 5월 국무장관 대리와 전쟁부가 이 안에 합의하면서 ‘암호국(Cipher Bureau)’이 생겼다(NSA, 크롬웰 인터내셔널). 처음 구상은 한 해 10만 달러에 육군이 60%를 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암호국은 육군의 관심이 덜한 외교 전보에 집중했으므로 참모총장이 육군 몫을 줄였고, 돈은 주로 국무부가 댔다(NSA). 실제로 들어온 돈은 한 해 1만 5,000~5만 달러 사이였다(NSA 논문).

왜 워싱턴이 아니라 뉴욕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야들리는 국무부 특별 자금을 워싱턴 안에서는 쓸 수 없다는 법적 제약을 들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나중에 워싱턴에 ‘스파이가 들끓었다’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NSA 논문, 크롬웰 인터내셔널). NSA는 국제 전신회사 여러 곳이 뉴욕에 있었다는 점을 그럴듯한 이유로 꼽는다.

사무실은 두 번 옮겼다. 이스트 38번가 3번지에서 1년쯤 지낸 뒤 1920년 7월 1일 이스트 37번가 141번지의 다른 브라운스톤으로, 1924년에는 그랜드센트럴역 옆 밴더빌트 애비뉴 52번지의 사무용 건물로 갔다(크롬웰 인터내셔널). ‘블랙 챔버’라는 별명은 야들리가 처음 지은 말이 아니다. 17~18세기 유럽 여러 나라의 비밀 암호해독실을 부르던 ‘검은 방(chambre noire)’에서 왔다(영문 위키백과, NSA 논문).

전신회사의 조용한 협조

외국 전보를 손에 넣는 길은 전신회사였다. 국무부와 전쟁부는 웨스턴유니언, 포스탈 텔레그래프 같은 회사와 특별한 약속을 맺었다(크롬웰 인터내셔널). 정보사 저술가 제임스 뱀포드는 이 회사들이 외국 대사관·영사관의 전보를 불법으로 넘겼고, 결국 ‘거의 미국 전신업계 전체’가 가담했다고 쓴다(영문 위키백과).

그러나 평화로운 때에 고객의 전보를 넘기기를 꺼리는 회사가 늘었다. 전보 비밀을 어겼을 때 처벌하는 범위를 넓힌 1927년 라디오법이 한 이유였을 수 있다(영문 위키백과). 야들리는 ‘꽤 교묘한 방법’으로 전보를 구해야 했다고 적었다. 크롬웰 인터내셔널은 이를 침입·절도·매수 같은 불법 수단으로 짐작한다(크롬웰 인터내셔널).

일본 외교 암호를 풀다

암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일본이었다. 암호 역사가 데이비드 칸은 중국을 향한 일본의 공세, 태평양에서 커지는 해군, 극동 시장을 노린 상업 확장이 모두 미국의 이익과 부딪혔다고 설명한다(영문 위키백과). 야들리 팀은 1년 가까이 매달린 끝에 일본 외교 코드를 풀었고, 1921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열릴 때도 일본 외교 전보를 읽고 있었다(영문 위키백과).

야들리는 1917년부터 1929년까지 외국 정부의 외교 암호 전보를 4만 5,000통 넘게 풀었다고 밝혔다. 그가 꼽은 코드북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중국, 코스타리카, 쿠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라이베리아,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페루, 엘살바도르, 도미니카공화국, 소련, 스페인의 것이었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동맹국 영국도 들어 있다. 다만 이 숫자는 야들리 자신의 주장이다.

구멍이 뚫린 누런 종이에 로마자 단어와 숫자가 세 단으로 타자되고 빨간 글씨와 손글씨 메모가 더해진 작업지
1919년 블랙 챔버가 일본 외교 암호를 풀 때 쓴 해독 작업지. 미국 국립암호박물관 전시품이다.
사진: Daderot · CC0 · Wikimedia Commons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 상대의 양보선을 미리 읽다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는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렸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핵심은 주력함 톤수를 나라별로 어떤 비율로 묶느냐였다. 미국 대표단의 안은 일본 해군을 미국의 60%로 묶는 비율, 곧 미국·영국·일본 10:10:6(5:5:3)이었다(크롬웰 인터내셔널). 미 해군은 그보다 더 낮은 10:10:5를 원했고, 일본은 10:10:7을 고집했다(미 국무부 역사실). 블랙 챔버가 푼 전보에는 도쿄가 대표단에게, 충돌을 피해야 한다면 결국 10:10:6까지 물러서라고 지시한 내용이 있었다. 이를 안 미국 대표단은 버텼고, 일본은 끝내 5:5:3을 받아들였다(크롬웰 인터내셔널,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이 비율은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가 서명한 5개국 조약에 들어갔다(미 국무부 역사실).

블랙 챔버는 상여금을 받았고, 야들리는 육군 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Medal)을 받았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하지만 훈장 문구는 군축회의에서 한 일이 아니라 전시 복무를 들었다(NSA 논문). NSA는 워싱턴 회의를 빼면 야들리의 조직이 정책이나 협상 결과에 직접 영향을 줬다고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발코니가 둘러싼 넓은 홀에서 사각형으로 놓인 긴 탁자에 대표단이 앉아 있고 가운데 탁자에서 몇 사람이 서류를 보는 흑백 사진
1921~22년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장면. 블랙 챔버가 푼 일본 외교 전보 덕분에 미국 대표단은 일본이 어디까지 물러설지 미리 알고 있었다.
사진: Harris & Ewing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쇠퇴와 폐쇄 — 1929년 10월 31일

회의가 끝나자 조직은 기울었다. 1924년 예산이 줄면서 야들리는 직원을 절반 넘게 내보냈고, 남은 사람은 야들리를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NSA 논문, 크롬웰 인터내셔널). 같은 무렵 워싱턴에서는 윌리엄 프리드먼이 육군을 위해 새로운 암호 연구를 하고 있었다(영문 위키백과).

1929년 허버트 후버 정부의 새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국무부 지원을 끊었다. 같은 해 봄 육군은 암호해독 업무를 통신단(Signal Corps)으로 넘기기로 했고, 통신단은 조직을 자기 방식으로 새로 꾸리면서 야들리와 직원을 모두 내보냈다(영문 위키백과, NSA 논문). 블랙 챔버는 1929년 10월 31일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직원들은 석 달 치 퇴직금을 받았고, 자료는 육군 신호정보국(SIS)으로 넘어갔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이 결정은 스팀슨의 한마디로 기억된다. ‘신사는 남의 편지를 읽지 않는다(Gentlemen do not read each other’s mail).’ 그러나 이 말이 실린 곳은 1929년 기록이 아니다. 1948년 스팀슨이 맥조지 번디와 함께 낸 회고록 『평화와 전쟁에서의 현역 복무(On Active Service in Peace and War)』에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라는 표현과 함께 나온다(스팀슨 회고록). 암호 연구가 루이스 크루는 1988년 학술지 『크립톨로지아』에서 이 결정을 스팀슨 혼자 내렸는지, 그 말을 언제 했는지를 다시 따졌다(크루, 1988).

NSA는 이 결정이 예산 사정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육군 암호 조직의 개편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야들리 자신은 스팀슨이 후버 대통령의 지시를 따랐다고 믿게 됐는데, 그 근거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여성 기자의 전언이었다(NSA 논문). 스팀슨의 반대는 우방국 외교관을 겨냥한 해독에 대한 것이었지 첩보 전반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그는 1940년 전쟁장관이 된 뒤 2차 대전 동안 해독한 적국 통신에 크게 기댔다(영문 위키백과).

콧수염을 기르고 정장에 무늬 넥타이를 맨 중년 남성의 흑백 초상 사진
1929년의 국무장관 헨리 L. 스팀슨. 그해 블랙 챔버에 대한 국무부 지원을 끊었다.
사진: Harris & Ewing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폭로 — 『아메리칸 블랙 챔버』와 일본과의 거래

블랙 챔버가 닫힌 것은 뉴욕 증시가 무너진 직후였다. 비밀 자금으로 일한 10년은 야들리의 공식 공무원 기록으로 남지 않았고, 연금도 없었다(영문 위키백과,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1967년 CIA 부국장에게 올라간 메모에 따르면, 야들리는 1930년 6월 워싱턴의 일본대사관에 미국이 오랫동안 일본 암호를 풀어 읽어 왔다는 사실과 해독 방법을 넘기고 7,000달러를 받았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이 거래는 1967년 작가 라디슬라스 파라고가 일본 외무성 문서를 근거로 책에 처음 썼다. NSA 역사가는 1981년 논문에서 그 문서를 확인했지만, 『코드브레이커』의 저자 데이비드 칸은 이 혐의를 믿지 않는 쪽이었다(NSA 논문, CIA 서평).

1931년 6월 1일 야들리는 『아메리칸 블랙 챔버(The American Black Chamber)』를 냈다. 정가 3.5달러인 이 책은 미국에서 1만 7,931부, 영국에서 5,480부가 팔렸고, 일본어판은 3만 3,119부가 팔렸다(영문 위키백과,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이 책으로 19개 나라가 자기 암호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영문 위키백과). 일본 외무성은 이 책을 100권 넘게 사서 대사관과 공사관에 보내 암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렸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NSA 논문).

이 책이 일본의 암호 강화와 군국주의를 부추겼다는 말은 흔하다. 하지만 그 정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제임스 뱀포드는 거래설을 바탕으로, 일본 군부가 이미 돈을 주고 산 정보를 야들리가 책으로 온 세상에 알렸기 때문에 일본 강경파가 더 분노했다고 썼다(영문 위키백과).

정부는 야들리를 기소하려 했지만 당시 법으로는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1933년 2월 그가 워싱턴 회의를 다룬 두 번째 원고 『일본 외교 비밀 1921~22(Japanese Diplomatic Secrets, 1921-22)』를 맥밀런 출판사에 넘기자, 연방보안관이 1917년 간첩법을 근거로 원고를 압수했다. 이 원고는 1979년에야 기밀이 풀렸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영문 위키백과). 1933년 의회는 외국 암호나 암호로 보낸 내용을 허락 없이 공개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 조항은 지금도 미국 연방법전 18편 952조로 남아 있다(영문 위키백과,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그 뒤 야들리는 중국 국민당 정부(1938~1940년)와 캐나다(1941년)에서 암호 일을 했지만, 미국 정부의 신뢰를 다시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NSA는 1999년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영문 위키백과).

유산 — 끊긴 조직, 이어진 자료

블랙 챔버의 서류는 1929년 10월 뉴욕에 온 윌리엄 프리드먼이 워싱턴으로 옮겼고, 새로 생긴 육군 신호정보국(SIS)이 이어받았다(크롬웰 인터내셔널). 프리드먼은 『아메리칸 블랙 챔버』가 출처와 방법을 드러냈고 야들리의 공을 부풀렸다며 크게 분노했다(영문 위키백과).

나비넥타이를 매고 콧수염을 기른 백발 남성의 흑백 초상 사진
윌리엄 F. 프리드먼. 블랙 챔버의 자료를 넘겨받은 육군 신호정보국(SIS)을 이끌었고, 야들리의 폭로 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진: 미국 국가안보국(NSA)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SIS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육군보안국(ASA)으로 바뀌었다. 1949년 5월 20일 군의 암호 업무가 국방부 아래 군보안국(AFSA)으로 모였고, 1952년 11월 4일 이것이 국가안보국(NSA)으로 다시 태어났다(영문 위키백과).

블랙 챔버가 NSA의 직계 조상인 것은 아니다. 직원은 모두 해고됐고, 조직은 이어지지 않은 채 서류만 넘어갔다(크롬웰 인터내셔널). 그래도 NSA는 이 조직을 미국 역사상 첫 평시 국가 단위 민간 정보기관으로 기록한다. 한 사람의 재능과 자기 과시, 전신회사의 협조, 예산과 관료 정치가 얽힌 이 10년은 한 가지 물음을 남겼다. 평화로운 때에도 정부가 다른 나라의 통신을 읽어야 하는가. 그 물음은 블랙 챔버가 닫힌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넓은 주차장에 둘러싸인 검은 유리 외벽의 큰 건물들을 위에서 내려다본 컬러 사진
메릴랜드주 포트미드의 국가안보국(NSA) 본부. 블랙 챔버의 자료는 신호정보국과 육군보안국을 거쳐 NSA의 역사로 이어진다.
사진: 미국 국가안보국(NSA)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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