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여름, 뉴욕 5번가 모퉁이의 낡은 4층 브라운스톤 건물 안에는 회사 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유니버설 코드 컴파일링 컴퍼니(Universal Code Compiling Company)’. 상업용 암호책이나 만드는 평범한 회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국 정부가 세운 비밀 암호해독 조직의 위장 명칭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현금으로 급여를 받는 민간인 신분이었고, 책상 위에는 외국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오간 전신 사본이 쌓여 있었다. 훗날 ‘블랙 챔버(The Black Chamber)’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이 조직은 미국 최초의 평시(平時) 암호해독기관이었다 —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해체되지 않고 살아남은 최초의 상설 조직이라는 뜻이다. 10년간의 은밀한 활동 끝에 이 조직은 스스로의 손으로 쓴 책 한 권 때문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 유산은 오늘날 미국 국가안보국(NSA)으로까지 이어진다.

기원: 1차대전이 낳은 비밀 조직, MI-8
블랙 챔버의 뿌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지 3주 만인 그해 4월 28일, 육군은 정보부 내에 암호 업무를 전담할 조직 ‘MI-8(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8, 암호과)’을 만들었다. 이 조직의 책임자가 된 인물이 허버트 O. 야들리(Herbert O. Yardley)였다. 인디애나주 워딩턴 출신으로 철도 전신기사 아버지 밑에서 전신을 익힌 그는 국무부 전신·암호 담당 서기로 공직에 들어왔고,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하우스 대령(Colonel Edward M. House) 사이에 오간 500단어짜리 암호 전문을 단 2시간 만에 풀어내면서 상부에 미국 암호 체계의 허술함을 경고한 바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1917년 6월 통신장교 예비군 중위로 임관했고, 그해 7월 MI-8의 책임자로 임명됐다.
MI-8은 어디까지나 전시 군 조직이었다. 종전과 함께 예산이 끊기고 인력이 흩어질 위기에 처하자, 야들리는 군 지휘부를 설득해 조직을 존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국무부와 육군의 공동 자금으로 1919년 5월 재편된 조직이 바로 블랙 챔버다. 육군이 초기 예산의 약 60%를 부담하다가 점차 국무부 쪽으로 재정 부담이 옮겨갔으며, 연간 예산은 약 10만 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90만 달러 안팎)였다. 정리하면 MI-8(1917년, 전시 조직)이 종전 후 블랙 챔버(1919년, 평시 조직)로 재편된 것이며, ‘미국 최초의 평시 암호해독기관’이라는 수식어는 바로 이 ‘평시’라는 한정어에서 성립한다 — 전쟁 중에만 존재하다 사라진 조직이 아니라, 평화가 찾아온 뒤에도 남은 최초의 상설 암호 조직이었다는 의미다.
왜 뉴욕이었나
1919년 여름, 조직은 워싱턴 D.C.가 아닌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들리 본인이 남긴 설명은 한 갈래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법적 제약’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후일에는 워싱턴이 “스파이로 넘쳐나서(overrun with spies)” 피했다는 말도 남겼다. 여기에 더해 실질적인 이유로 꼽히는 것이 뉴욕이 웨스턴유니온(Western Union) 등 주요 국제전신회사들의 본사가 몰려 있는 도시였다는 점이다. 정치적 감시를 피하려는 목적과 전신 인프라에 접근하려는 실용적 목적이 함께 작용했다고 보는 편이 균형 잡힌 설명일 것이다.
블랙 챔버의 첫 사무실은 5번가 모퉁이 3 East 38th Street의 4층 브라운스톤 건물로, 1919년 여름부터 1920년 7월까지 사용됐다. 이후 141 East 37th Street(1920년 7월~1924년)를 거쳐, 마지막에는 그랜드센트럴역 인근 52 Vanderbilt Avenue(1924년~1929년 10월)로 옮겨 폐쇄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침묵의 협조자들: 전신회사와의 은밀한 거래
블랙 챔버가 그토록 방대한 양의 외국 전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데는 상업 전신회사들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국무부와 전쟁부는 웨스턴유니온과 포스탈텔레그래프(Postal Telegraph) 등과 ‘특별 협조 관계’를 맺었고, 초기에는 이들 회사가 외국 대사관·영사관이 주고받은 전신 사본을 블랙 챔버 분석관들에게 직접 넘겨주었다. 정보역사가 제임스 뱀포드(James Bamford)는 이를 두고 “거의 미국 전체 전신산업”이 결국 이 관행에 발을 들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협조는 시간이 지나며 눈에 띄게 위축됐다. 192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야들리 스스로 “다소 은밀한 방법”에 의존해야 했다고 인정했는데, 여기에는 불법적인 절도나 매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협조가 약화된 배경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1927년 제정된 라디오법(Radio Act of 1927)이다. 이 법은 전신 비밀 유지 의무를 위반했을 때의 형사처벌을 강화해, 전신회사들이 예전만큼 선뜻 협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블랙 챔버 최고의 순간
블랙 챔버가 남긴 가장 유명한 성과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린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기간에 나왔다. 회의 테이블에서 일본은 공개적으로 미국·영국·일본의 주력함 톤수 비율을 10:10:7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랙 챔버가 해독한 일본 외교 전문을 통해, 도쿄가 실제로는 5:5:3(혹은 10:10:6) 수준까지도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상대의 진짜 마지노선을 손에 쥔 미국 협상단은 이 정보를 근거로 일본을 강하게 압박했고, 최종적으로 미국·영국 각 52만 5천 톤, 일본 31만 5천 톤에 해당하는 5:5:3 비율을 관철시켰다. 이 사실은 대중적 사료뿐 아니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국무부가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에서 유리하게 활용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명시될 만큼 권위 있게 확인된 대목이다. 야들리는 이 공로로 공로훈장(Distinguished Service Medal)을 받았다.
이 사건 하나로 블랙 챔버의 존재 가치는 증명된 셈이었다. MI-8 시절을 포함해 폐쇄되는 1929년까지 12년간(1917~1929년) 이 조직이 해독한 외국 외교 전문은 총 4만5천 건 이상으로 집계된다.

1929년 10월 31일, 문이 닫히다
블랙 챔버는 1929년 10월 31일 공식적으로 폐쇄됐다. 흔히 회자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허버트 후버 행정부에서 새로 취임한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국무부의 자금 지원을 철회했고, 훗날 스팀슨은 맥조지 번디와 함께 쓴 1948년 회고록 ‘On Active Service in Peace and War’에서 “신사는 남의 편지를 읽지 않는다(Gentlemen do not read each other’s mail)”는 말로 이 결정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일화를 단순한 미담으로만 옮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우선 이 인용문이 실제로 1929년 당시에 나온 발언인지, 아니면 회고록을 집필한 1947~48년 무렵에 정리된 표현인지 자체가 불확실하다 — 암호학사가 루이스 크루(Louis Kruh)는 1988년 학술지 《Cryptologia》에 이 문구의 시점과 진위를 정면으로 재검토하는 논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게다가 폐쇄 결정에는 재정·조직상의 현실적 배경도 함께 얽혀 있었다. 블랙 챔버는 원래 육군이 만든 조직이었지만 활동을 감추기 위해 예산을 국무부 항목(연 4만 달러 수준)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운영돼 왔고, 마침 육군도 부대 개편을 이유로 이 조직을 통신단(Signal Corps) 예하로 이관하던 참이었다. 즉 예산과 조직 정치라는 관료적 요인이 국무부의 지원 철회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흥미롭게도 NSA 자체의 역사 자료(‘Herbert Hoover, the Black Chamber, and Food’)는 야들리 본인이 폐쇄의 책임을 스팀슨이 아니라 후버 대통령에게 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다만 모든 역사가가 이 평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후버 본인은 훗날인 1954년 7월 12일 한 군사정보 역사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안에 대해 “나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자기 부처를 운영하는 것은 장관(스팀슨)의 책임이었다”고 답했다. 스팀슨의 원칙 역시 일반론이라기보다는 우호국 외교관을 겨냥한 평시 암호해독에 특정된 윤리적 반대였다는 해석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스팀슨이 훗날 1940년 전쟁장관이 되어서는 태평양전쟁 중 일본 암호를 해독하는 ‘매직(MAGIC)’ 작전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직접 승인했다.
회고록 논란과 일본의 반응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야들리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1931년 6월 회고록 《아메리칸 블랙 챔버(The American Black Chamber)》를 펴냈다. 정가 3.50달러였던 이 책은 미국 내에서만 1만7,931부가 팔렸고, 암호학사가 데이비드 칸(David Kahn)은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암호학 서적”이라 평했다.
이 책의 출간이 이후 일본의 암호 강화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지만,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정도의 문제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 관련 서술들은 일본 정부가 미국의 암호 해독 능력을 인지하고 이에 대응해 자국 암호 역량을 강화했으며, 이것이 훗날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수도 있다”는 조건부 표현을 쓰고 있다. 더구나 사실관계를 하나 더 보태면, 일본은 이 책이 출간되기 이전인 1930년 6월에 이미 야들리 본인으로부터 같은 정보를 직접 구매한 바 있다. 재정난에 몰린 야들리가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에 7,000달러를 받고 비공개를 약속하며 정보를 넘긴 이 거래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제임스 뱀포드의 조사로 드러났다. 따라서 일본의 암호 강화에는 1930년의 직접 거래와 1931년의 책 출간이라는 최소 두 개의 경로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책 한 권이 유일한 계기였다”는 단순화된 서술은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폐쇄 이후 야들리는 한동안 미국 정부의 ‘기피 인물’로 취급받았지만, 이후 중국 정부(1938~1940년)와 캐나다 정부(1941년)의 암호 자문으로 고용돼 각국의 ‘블랙 챔버’를 이끄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다만 미국 측의 견제로 활동에는 제약이 있었다). 1933년 2월에는 그가 1921~22년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당시 성과를 정리한 원고(제목이 자료마다 ‘Japanese Diplomatic Codes: 1921-1922’ 또는 ‘Japanese Diplomatic Secrets, 1921-22’로 다르게 기재된다)가 간첩법(Espionage Act)을 근거로 연방보안관에 압수됐다. 이 원고는 197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밀에서 해제됐다. 이 압수 사건은 같은 해 3월 ‘비밀보호법(Secrets Act)’ 제정 추진의 계기가 됐고, 이 법은 훗날 미국 연방법전 18편 952조로 자리 잡아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 사건에도 적용됐다.

유산: SIS에서 NSA까지
블랙 챔버가 폐쇄되면서 그 자료와 기능은 육군 통신단으로 이관됐다. 이 조직은 윌리엄 프리드먼(William Friedman)이 지휘하는 신호정보국(Signal Intelligence Service, SIS)으로 재편됐고, 이후 통신보안대(Signal Security Agency, 1943년) → 육군보안국(Army Security Agency, 1945년)을 거쳐, 1952년 11월 4일 오늘날의 국가안보국(NSA)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했다.
NSA는 자체 역사 자료에서 블랙 챔버를 “미국 최초의 평시 암호분석 조직(the first peacetime cryptanalytic organization in the United States)”으로 공식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NSA의 역사 시리즈 ‘History Today’는 야들리를 둘러싼 통념이 시간이 지나며 재평가되어 왔다는 점도 짚는다 — 예컨대 그가 ‘반(反)기술적’인 인물이었다는 식의 통념이 이후 수정되어 온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재능과 야심, 그리고 국가 예산과 관료 정치, 신생 통신 기술이 뒤엉켰던 이 10년짜리 실험은 결국 실패나 성공 어느 한쪽으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유산을 남겼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신호정보 기관이 뻗어 나온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뉴욕의 낡은 브라운스톤 건물에서 위장 회사 간판을 걸고 일하던 소수의 암호해독가들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참고 자료
- LegalClarity, “What Was the Black Chamber? America’s First Cipher Bureau” — legalclarity.org
- Wikipedia, “Black Chamber” — en.wikipedia.org
- Cromwell International, “Finding the American Black Chamber in New York” — cromwell-intl.com
- Wikipedia, “Herbert Yardley” — en.wikipedia.org
- Smithsonian Magazine, “The Spy Who Exposed the Secrets of the Black Chamber” — smithsonianmag.com
- Louis Kruh, “Stimson, the Black Chamber, and the ‘Gentlemen’s Mail’ Quote”, Cryptologia Vol. 12, No. 2 (1988) — tandfonline.com
- NSA Center for Cryptologic History, “History Today: Herbert Hoover, the Black Chamber, and Food” (2019) — nsa.gov
- Encyclopaedia Britannica, “Herbert Osborne Yardley” — britannica.com
- Wikipedia, “The American Black Chamber” — en.wikipedia.org
- NSA Center for Cryptologic History, “History Today: Herbert Yardley — Has the Story Changed?” (2018) — nsa.g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