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놓인 각궁(角弓)을 처음 보면 활이라기보다 끊어진 팔찌처럼 보입니다. 시위를 풀어 둔 각궁은 몸 전체가 뒤로 말려, 양 끝이 거의 맞닿을 만큼 둥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활을 쏘려면 고리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 시위를 걸어야 합니다. 왜 처음부터 곧게 만들지 않고 일부러 거꾸로 휘게 만들었을까요? 답은 물소뿔·대나무·쇠심줄을 겹친 층 구조, 그리고 당기기 전부터 힘을 모아 두는 설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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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린활과 얹은활, 같은 활의 두 모습
국궁에서는 쏘던 활의 시위를 내려 두는 것을 ‘활을 부린다’, 시위를 활 끝의 고자에 거는 것을 ‘활을 얹는다’고 합니다. 시위를 풀어 둔 활이 부린활, 시위를 건 활이 얹은활입니다.
나무 한 토막으로 만든 단순한 활은 시위를 풀면 대개 곧은 모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각궁처럼 중앙아시아 계열에 속하는 합성궁은 시위를 풀면 몸 전체가 과녁 쪽 면(등)으로 크게 휘는 반곡(反曲) 활입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의 물리학자 티모 니에미넨(Timo A. Nieminen)은 이런 활이 뚜렷한 ‘C’자 모양을 이루며, 한국 활처럼 극단적인 경우에는 양 끝이 서로 겹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Historiographer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활을 얹는다는 것은 이 C자를 거꾸로 펴서 반대편으로 구부린 뒤 시위를 거는 일입니다. 그래서 얹은활은 아직 시위를 당기지 않았는데도 이미 크게 휘어 있고, 그 안에 힘이 쌓여 있습니다.

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구독) · 생성 의도: 부린활이 뒤집혀 얹은활이 되는 과정과 층의 위치 변화를 보여 주는 개념도
한 가지 재료로는 버틸 수 없는 이유
활을 당기면 활 몸의 두 면이 정반대의 일을 겪습니다. 과녁 쪽 면인 등은 점점 늘어나고(인장), 궁사 쪽 면인 배는 점점 짓눌립니다(압축). 니에미넨은 두 힘을 모두 크게 견디면서 많이 휠 수 있는 단일 재료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나무 한 토막으로 만든 활은 재료가 부러지지 않도록 당기는 길이의 약 2.3배만큼 길어야 했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각궁은 이 문제를 재료마다 역할을 나눠 맡기는 방식으로 풉니다. 국가유산청의 궁시장 설명에 따르면 각궁은 손잡이 부분에 참나무, 양 끝에 뽕나무를 대고, 탄력을 위해 대나무 심(죽심)을 넣은 뒤 그 안팎에 쇠뿔과 쇠심줄을 민어부레풀로 붙여 만듭니다. 합성궁에서 뿔은 궁사 쪽인 배에, 힘줄은 바깥쪽인 등에 붙입니다. 뿔은 짓누르는 힘에 특히 강하고, 힘줄은 잡아당기는 힘에 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두 재료 모두 나무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구독) · 생성 의도: 각궁 날개의 재료 배치와 압축·인장을 설명하기 위한 단면 개념도
국가유산진흥원은 각궁의 재료를 물소뿔·대나무·소심줄·뽕나무·참나무·민어 부레풀·화피의 ‘7재(材)’로 정리합니다. 화피는 벚나무 껍질로, 고종이 쓰던 것으로 전하는 각궁도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화피 위에 채색을 했습니다. 힘을 맡는 뿔과 힘줄, 뼈대를 잡는 대나무와 나무, 이들을 하나로 묶는 풀, 겉을 감싸는 껍질이 저마다 자리를 나눠 맡는 셈입니다.
각궁의 검은 배를 이루는 물소뿔은 한반도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물소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활을 만들 물소뿔을 중국·일본·류큐(지금의 오키나와) 등에서 들여와야 했습니다. 재료 자체가 적어 대량으로 만들기 어려운 전략 물자였던 셈입니다.

Museum of Veterinary Anatomy FMVZ USP / Wagner Souza e Silva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거꾸로 휜 활이 힘을 더 모으는 원리
활이 화살에 넘겨줄 수 있는 에너지는 시위를 당기는 동안 궁사가 한 일, 곧 ‘당기는 힘’을 ‘당긴 거리’만큼 쌓은 값입니다. 가로축에 당긴 거리, 세로축에 힘을 두고 그래프를 그리면 곡선 아래 넓이가 당기는 동안 활에 쌓인 에너지, 곧 화살에 넘겨줄 수 있는 에너지의 최대치가 됩니다.
곧은 활은 당긴 만큼 힘이 차츰 늘어나, 처음에는 가볍고 끝으로 갈수록 무거워집니다. 반면 거꾸로 휜 활은 얹는 순간 이미 반대로 구부려져 있어서, 당기기 시작한 직후부터 힘이 빠르게 커집니다. 마지막에 손에 걸리는 무게가 같더라도 당기는 초반부터 힘이 더 실리니 곡선 아래 넓이, 곧 저장되는 에너지가 더 커집니다. 니에미넨은 반곡 설계가 바로 이렇게 위로 볼록한 힘 곡선을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실험 수치로 보면 차이가 뚜렷합니다. 네덜란드의 활 역학 연구자 B. W. 코이(Kooi)는 1993년 논문에서 복원 활로 화살을 쏜 실험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똑같이 81.3cm를 당겨 50g짜리 화살을 쏘았을 때, 중세 롱보우 복원품은 끝까지 당기는 데 36.2kgf가 들었고 화살은 초속 53m로 날아갔습니다. 반곡 합성궁인 타타르형 복원품은 그 4분의 3 정도인 27.2kgf만 들었는데도 화살이 초속 51m로 거의 같은 속도를 냈습니다. 당기는 힘과 거리에 견주어 화살이 얻은 운동 에너지의 비율로 따지면 롱보우가 0.24, 합성궁이 0.30입니다. 같은 힘으로 당겼다면 합성궁이 화살에 약 4분의 1 더 많은 에너지를 실어 보낸 셈입니다.

GLU 제작 그래프 · 자료: B. W. Kooi(1993), Journal of the Society of Archer-Antiquaries 36:14–18, Table 3
이 비교는 각궁이 아니라 같은 계열의 합성궁 복원품을 다룬 것이지만, 반곡이 힘을 모으는 원리는 같습니다. 코이는 끝부분이 굽지 않는 반곡 활에서는 그 단단한 끝이 지렛대처럼 작용해, 당기는 힘과 거리에 견주어 활에 모아 두는 에너지의 비율이 커진다고도 설명합니다. 각궁 양 끝에 대는 뽕나무 부분이 바로 그런 굽지 않는 끝입니다. 니에미넨은 큰 반곡 덕분에 비교적 짧은 활로도 큰 당김 힘과 긴 당김 거리를 얻을 수 있으며, 한국 활은 궁사가 시위를 귀까지 당길 만큼 당김 거리가 길었다고 덧붙입니다.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 활
여러 재료를 풀로 붙인 만큼 약점도 분명합니다. 각궁을 붙이는 민어부레풀은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으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궁장은 여름철에는 활을 만들지 않고, 10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다 만든 활도 마찬가지여서, 합성궁의 유기 접착제는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약해지고, 장마철 습기를 먹은 각궁은 탄성이 떨어진다고 전해집니다.
한국전통지식포탈이 정리한 각궁 제작 과정은 21단계에 이릅니다. 대나무와 나무를 불에 달궈 휘어 두고, 뿔을 붙인 뒤, 소의 힘줄을 두들겨 가늘게 찢어 여러 차례에 나눠 붙입니다. 힘줄을 붙이고 나면 따뜻한 방에서 한 달가량 말리고, 마무리 단계에서는 도지개라는 도구를 대어 활의 중심 부분을 뒤집은 다음 열을 가하며 모양을 잡습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요령 없이 다루면 망가지기 쉬운 탓에 오늘날 활터에서는 개량궁이 각궁을 상당 부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국궁의 과녁은 예나 지금이나 멀리 있습니다. 국궁은 120보, 약 145m 떨어진 표준 과녁을 쏩니다. 각궁은 엄지로 시위를 걸어 당기는 방식이어서, 궁사들은 흔히 엄지에 깍지를 낍니다.

Jjw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Ryuch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지금도 이어지는 활 만드는 기술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술인 궁시장(弓矢匠)은 1971년 9월 13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됐습니다. 활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矢匠)이라 부릅니다. 고종이 쓰던 활로 전하는 각궁 한 점은 1976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됐는데, 전체 길이는 124cm이고 양 끝에는 ‘호미(虎尾)’와 고종의 호인 ‘주연(珠淵)’이 새겨져 있습니다.
거꾸로 휜 모양에 담긴 설계
시위를 푼 각궁이 고리처럼 말려 있는 것은 잘못 만든 모양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입니다. 짓누르는 힘은 뿔이, 잡아당기는 힘은 힘줄이 나눠 맡고, 대나무와 나무가 뼈대를 잡습니다. 그리고 활 전체를 미리 거꾸로 휘어 두어, 시위를 당기기 전부터 힘을 모아 둡니다. 창조물에서 얻은 재료마다 다른 성질을 정확히 읽어 낸 이 층 구조 덕분에, 작은 활 하나가 큰 힘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궁시장(弓矢匠) — 국가무형유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각궁(角弓) — 국가민속문화유산
- 국가유산진흥원 — 궁시장 김박영 (국가유산이야기, 2021-01-21)
- 한국전통지식포탈 — 궁시장(47호) / 김박영, 유영기
- arXiv:1101.1677 — The Asian war bow (T. A. Nieminen, 19th Australian Institute of Physics Congress, 2010)
-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저자 게시본) — On the Mechanics of some Replica Bows (B. W. Kooi, Journal of the Society of Archer-Antiquaries 36:14–18, 1993)
- Wikipedia — Composite bow
- Wikipedia — Gakgung
- 동국대학교 HK+ 사업단 — 물소의 뿔에 얽힌 엉뚱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김승현, 2021-06-22)
- 위키백과 — 각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