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 무렵, 시안(옛 장안) 서쪽 숭인사 근처에서 땅을 파던 일꾼들이 커다란 비석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머리 부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고, 몸돌에는 한자 사이로 낯선 시리아 문자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 돌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입니다. 781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635년 아라본이라는 수도사가 장안에 들어온 뒤 약 150년 동안 당나라에서 이어진 기독교 공동체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635년의 사건, 781년의 기록, 1625년 무렵의 재발견은 서로 다른 시간입니다. 이 셋을 나눠 읽으면 비석이 무엇을 증언하고 어디부터는 말해 주지 않는지가 함께 보입니다.

사진: David Castor (user:dcasto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돌의 이름부터 읽어 봅니다
시안 비림박물관의 안내에 따르면 이 비석은 당 덕종 건중 2년(781) 장안의 대진사(大秦寺)에 세워졌습니다. 몸돌은 높이 193cm, 너비 96cm이고, 해서체 32행에 한자 1,780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글은 페르시아에서 온 수도사 경정(景淨)이 짓고, 글씨는 여수암(呂秀巖)이 썼습니다.
비석 이름의 낱말에는 각각 뜻이 있습니다. 박물관은 ‘대진(大秦)’을 옛 중국이 동로마제국을 부르던 이름으로, ‘경교(景教)’를 기독교 동방교회의 중국 이름으로 설명합니다. 비문의 영어 번역은 경교를 ‘빛나는 가르침(Luminous Religion)’으로 옮깁니다. 그러니 이름 전체는 ‘대진에서 온 빛나는 가르침이 중국에 퍼진 일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대진’이라는 말이 아라본의 출생지나 장안까지 온 정확한 길을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여섯 개의 연대로 보는 비석의 일생
| 연대 | 무슨 일인가요? | 읽을 때 주의할 점 |
|---|---|---|
| 635년 | 아라본의 장안 도착 | 그해의 현장 기록이 아니라 781년 비문 속 회고입니다. |
| 638년 | 장안 의녕방에 첫 대진사를 세우라는 조칙 | 이것도 비문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
| 781년 | 건중 2년, 비석 건립 | 비문 자체의 제작 시점입니다. 635년과는 146년 차이입니다. |
| 845년 | 회창 연간의 종교 탄압, 외래 종교 성직자 환속 명령 | 비석이 이때 묻혔다는 설명이 많지만, 매장 날짜를 적은 기록은 없습니다. |
| 1623년 또는 1625년 | 명나라 말의 재발견 | 학술 자료마다 두 연도가 함께 나옵니다. |
| 1907년 | 비림(지금의 비림박물관)으로 이전 | 해외 반출 시도를 막는 과정에서 옮겨졌습니다. |
비문이 전하는 첫 만남

비문: 경정(景淨, 781) · 이미지 발췌: 위키미디어 공용 사용자 Pataliputra!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비문에는 「貞觀九祀至於長安」, 곧 ‘정관 9년에 장안에 이르렀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관 9년은 635년입니다. 비문은 이어서 당 태종이 재상 방현령을 서쪽 교외로 보내 아라본 일행을 맞아들였고, 궁중 서고에서 경전을 번역하게 했다고 적습니다. 3년 뒤인 정관 12년(638)에는 조칙을 내려 장안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 한 곳을 짓고 수도사 21명을 두게 했다고 합니다.
그 뒤의 서술도 이어집니다. 고종은 여러 주에 경교 사원을 세우게 했고, 비문은 그 시절을 「法流十道 … 寺滿百城」, 곧 ‘가르침이 열 개의 도에 흐르고 사원이 백 개의 성에 가득했다’고 표현합니다. 현종 때인 천보 초에는 대장군 고력사가 다섯 황제의 초상을 사원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순서는 L. Eccles와 S. N. C. Lieu가 정리한 원문·영어 번역 대조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장 앞에 붙이는 말이 중요합니다. “635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만 쓰면 기록과 사건 사이의 146년이 사라집니다. “781년의 비문은 635년의 도착을 이렇게 전한다”라고 읽어야 사료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사원이 백 개의 성에 가득했다’는 말도 실제 숫자를 센 통계라기보다 공동체의 성장을 기리는 표현으로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늦게 쓴 기록이라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공동체가 자신들의 시작을 어떻게 기억하고 공적으로 설명했는지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낯선 신앙을 한문으로 옮기다
비문 앞부분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당나라 독자가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풀어 씁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삼일(三一)’로, 메시아는 소리를 따서 ‘미시가(彌施訶)’로 적었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室女誕聖於大秦 景宿告祥 波斯睹耀以來貢」, 곧 ‘동정녀가 대진에서 성인을 낳자 빛나는 별이 상서로움을 알렸고, 페르시아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왔다’고 씁니다. 복음서의 동방박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또 ‘경전 27부를 남겼다(經留廿七部)’는 구절도 있지만, 그 27부가 어떤 책들을 가리키는지는 비문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낱말 선택입니다. 이 공동체는 성직자를 ‘승(僧)’, 교회를 ‘사(寺)’라고 불렀습니다. 불교에서 익숙하게 쓰던 말을 빌려 자신들을 소개한 것입니다. 아래 측면 탁본에서도 ‘승 경복(僧景福)’처럼 이름 앞에 ‘승’이 붙어 있습니다.

비문: 경정·여수암(781) · 탁본 이미지: 아이치현립대학 자료(위키미디어 공용 사용자 Mhss 업로드)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두 문자로 새긴 사람들
비석의 앞면과 좁은 양 측면에는 성직자 이름이 시리아어와 한자로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주교 한 명, 지역 주교 두 명, 부제장 두 명과 70명 안팎의 수도사·사제 이름입니다. 시리아어 이름과 한자 이름이 소리가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닮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글을 지은 경정의 시리아 이름은 ‘아담’입니다. 시리아어 설명은 그를 ‘중국(시니스탄)의 사제이자 지역 주교, 파파시’라고 소개합니다. 파파시는 글자 그대로 ‘교황’을 뜻하는 드문 칭호인데, 학자들은 대체로 아담이 중국 교구를 이끈 대주교였다고 봅니다. 흥미로운 대목도 있습니다. 시리아어 날짜 문구는 동방교회 총대주교로 하난이쇼 2세의 이름을 적었는데, 그는 비석이 세워지기 몇 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780년 5월 바그다드에서 티모테오스 1세가 새 총대주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아직 장안까지 닿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그다드와 장안 사이의 거리가 돌 위의 이름 하나에 남아 있는 셈입니다.

비문: 경정·여수암(781) · 이미지 발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 사용자 Pataliputra!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 비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 비석 하나로 확정하기 어려운 것 |
|---|---|
| 781년에 한문·시리아어로 자기 역사를 기록한 공동체 | 당나라 전체 기독교인의 정확한 수 |
| 635년 도착과 638년 조칙을 전하는 서술 | 그 서술의 모든 세부를 독립적으로 입증하는 일 |
| 황실 후원과 신앙의 가치를 강조하는 표현 | 사회 전체가 같은 평가를 했다는 결론 |
| 바그다드 총대주교와 이어진 교회 조직 | 매장 시점과 이유, 그 뒤 신앙의 연속성 전체 |
십자가와 연꽃: 관찰과 해석의 경계
비석 머리돌의 제목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구름무늬와 연꽃이 받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관찰입니다.

이미지: 작자 미상(비석 십자가의 후대 모사)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문제는 그 뜻입니다. 워싱턴대학교 실크로드 전시는 시애틀미술관의 머리돌 탁본을 소개하면서, 구름은 도교를, 연꽃은 불교를 나타내고 그 위의 십자가는 경교의 우위를 뜻한다는 한 연구자의 해석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이 선화가 실린 위키미디어 공용의 옛 설명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같은 구름을 이슬람의 상징으로 읽습니다. 두 설명은 근거의 무게가 다르지만, 같은 무늬가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읽힐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무늬가 있다는 사실과 그 무늬의 의도를 설명하는 해석은 같은 단계의 증거가 아닙니다. 불교와 도교에 익숙한 당나라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할 수는 있지만, 이 구도 하나로 교리를 섞었다거나 다른 종교를 압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돌은 언제, 왜 땅에 묻혔을까요?
비석이 세워지고 60여 년 뒤, 당 무종은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벌였습니다. 『구당서』 무종 본기는 회창 5년(845) 8월의 조서에 「勒大秦、穆護、祆三千餘人還俗」, 곧 ‘대진(경교)·목호·현교(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 3천여 명을 환속시킨다’는 구절을 남겼습니다. 불교만이 아니라 경교와 조로아스터교 같은 외래 종교의 성직자들도 함께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비림박물관은 이 탄압에 연루되어 경교 사원이 허물어졌고 비석도 자취를 감췄다고 설명합니다.
비석이 이때 땅에 묻혔다는 설명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다만 781년의 비문은 그 뒤에 일어난 자신의 매장을 기록할 수 없습니다. 845년 무렵에 묻혔다는 설명은 그럴듯한 추정이지만,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묻었는지 적은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약 780년 동안 땅속에 있었다’는 말은 추정 매장 연도에서 재발견 연도까지를 잰 대략의 기간으로 읽어야 합니다.
다시 나타난 돌, 유럽으로 건너간 글자
비림박물관은 비석이 명 천계 5년(1625) 초봄 시안성 서쪽 숭인사(금승사) 부근에서 나왔고, 그곳이 당나라 대진사 옛터였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폴 펠리오의 유고를 안토니노 포르테가 엮은 비문 연구는 발견 연도를 1623년 또는 1625년으로 적고, 비석이 처음 세워진 곳을 장안이 아니라 가까운 주지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발견 당시의 정확한 정황은 지금도 연구 대상입니다.
비석은 곧 예수회 선교사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홍콩대학교 도서관의 고서 도록에 따르면 포르투갈 예수회의 알바루 세메두는 비석이 나온 뒤 이를 직접 본 첫 유럽인이었습니다. 비문 번역은 여러 유럽 언어로 빠르게 퍼졌고, 1667년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중국도설』은 한자와 시리아 문자 원문을 큰 접이식 지면에 싣고 라틴어 번역과 로마자 읽기를 붙였습니다. 키르허는 중국에 가 본 적이 없고, 다른 선교사들이 보낸 자료를 엮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미지: Gleeson Library(샌프란시스코대학교) 소장본 · CC0 · Wikimedia Commons
1907년, 비석이 박물관으로 들어간 사연
비석은 발견 뒤 200년 넘게 숭인사 안에 있었습니다. 1859년 관리 한태화(韓泰華)는 이곳을 찾아 글자가 온전한 것을 기뻐하며 비각을 다시 짓고, 비석 왼쪽 측면에 방문 기록을 새겼습니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가 소장한 측면 탁본에도 수도사 이름과 함께 이 1859년의 글이 찍혀 있습니다. 한 장의 탁본 안에 781년의 글과 1859년의 글이 함께 들어 있는 셈입니다.
1907년 5월에는 덴마크 사람 프리츠 홀름이 시안에 와서, 은 3천 냥으로 절의 승려들을 매수해 비석을 외국으로 옮기고 같은 돌로 새긴 복제비를 대신 세우려 했습니다. 비림박물관에 따르면 이 계획은 9월에 복제비가 완성된 뒤 운반을 의논하던 중에 새어 나갔고, 지방 당국이 막아 홀름은 복제비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원래 비석은 그해 10월 2일부터 6일 사이에 거북 받침과 함께 비림으로 옮겨졌습니다.

사진: Frits V. Holm(1907)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홀름의 복제비는 뉴욕으로 건너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약 10년 동안 대여 형식으로 전시되었고, 1917년 한 뉴욕 부인이 사들여 로마 교황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밖에도 일본 고야산과 파리 기메 박물관 등 여러 곳에 복제물이 있습니다. 원석은 지금도 시안 비림박물관에 있습니다.
제목의 ‘800년’은 무엇과 무엇의 차이일까요?
제목의 비교 기준은 781년 비석 건립과 1583년 예수회의 미켈레 루지에리·마테오 리치가 광둥성 자오칭에 자리 잡은 일입니다. 마카오 문화국에 실린 조지프 시베스의 연구에 따르면 두 사람은 1583년 9월 10일 자오칭 정착에 성공했습니다. 두 연도의 차이는 802년이라 ‘약 800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라본의 도착을 기준으로 하면 1583−635=948년입니다. 이 숫자들은 비석이 땅속에 있던 기간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 1583년이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 처음 온 해라는 뜻도 아닙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는 이미 1294년 원나라 수도 칸발리크(지금의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제목의 비교는 ‘서양 선교사 전체’가 아니라 명나라 말 예수회 선교와의 시간차로 좁혀 읽어야 정확합니다.
경교비의 힘은 빈칸을 모두 채워 준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문과 시리아어로 남은 이름, 781년의 날짜, 635년을 돌아보는 문장, 바그다드 소식이 늦게 닿은 흔적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건과 기록, 원석과 복제물, 관찰과 해석을 나눠 읽으면 이 돌은 ‘놀라운 옛이야기’를 넘어, 역사의 증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까지 가르쳐 줍니다.
참고 자료
비문 원문은 공개된 전사·번역 자료와 대조했습니다. 아래 목록은 이 글에서 실제로 사용한 자료이며, 학술서 안내 페이지만 읽은 경우 그 책 전체를 열람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 大秦景教流行中国碑 – 시안 비림박물관
- L. Eccles·S. N. C. Lieu, The Xi’an (Nestorian) Monument: 비문 원문·영어 번역 대조(PDF)
- 『구당서』 권18상 무종 본기 – 위키문헌
- Paul Pelliot·Antonino Forte, L’inscription nestorienne de Si-ngan-fou – ISEAS 교토
- Rubbing of the top panel of the Nestorian Tablet – 워싱턴대학교 실크로드 전시
- SC79 Rubbings from the side of the Nestorian Stele –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기록보관소
- 홍콩대학교 도서관 서양 고서 전시 도록(PDF), 세메두·키르허 항목
- Joseph Sebes, The Precursors of Ricci – 마카오 문화국 Review of Culture
- Nestorian Stele – 영문 위키백과
- John of Montecorvino – 영문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