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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혔다 다시 나타난 돌 하나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서양 선교사보다 800년 앞선 흔적

중국 시안(西安)의 비림(碑林) 박물관에는 검은 석회암 비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거북 모양 받침(귀부, 龜趺)을 제외한 비신(碑身)의 높이가 약 2.79m에 이르는 이 돌의 정식 이름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대진의 빛나는 종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리는 비’라는 뜻입니다. 비문에 새겨진 간지(干支) 기년에 따르면 이 비석은 건중(建中) 2년, 곧 781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아시아에 닿기 약 800년 전, 이미 이 땅에 기독교 공동체가 실재했음을 증언하는 돌입니다.

시안 비림 박물관에 서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전체 모습
시안 비림 박물관에 보존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781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거북 받침 위에 비신이 솟아 있습니다. 이미지: David Castor (user:dcasto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돌 위에 나란히 새겨진 두 개의 문자

이 비석이 특별한 이유는 먼저 물리적인 데 있습니다. 비면에는 한문과 시리아어가 나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동아시아 한복판에서 시리아 문자가 발견된다는 것은, 그 글자를 쓰던 공동체가 그곳에 살았음을 보여 주는 든든한 근거입니다. 이 신앙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점 삼아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뻗어 온 기독교의 한 갈래로, 스스로를 ‘경교(景敎)’, 곧 ‘빛나는 종교’라 칭했습니다. 오늘날 흔히 ‘네스토리우스파’로 불려 왔지만, 본래 이름은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입니다.

비석에 새겨진 시리아 문자(에스트랑겔라체) 비문
비석에 한문과 나란히 새겨진 시리아어 비문. 동아시아 한복판에 동방교회 공동체가 실재했음을 보여 주는 물증입니다. 이미지: Jingjing and Lü Xiuyan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비문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635년, 당 태종 정관 9년에 시작됩니다. 시리아어를 쓰던 수도사 아라본(阿羅本, Alopen)이 동료들과 함께 장안에 도착해 태종의 환대를 받았고, 가져온 경전을 황실 서고에서 번역하게 했다고 합니다. 638년에는 포교를 공인하는 칙령이 내려져, 의녕방(義寧坊)에 사원이 세워질 무렵 21명의 수도사(대체로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됩니다)가 인정받았습니다. 도착(635)부터 비석 건립(781)까지, 비석이 다루는 역사는 약 150년에 이릅니다. 다만 비문 자체가 황실의 후원을 기리는 송덕(頌德)의 글이라, 환대와 번영을 묘사한 대목은 중립적 보도가 아니라 비문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사실로 읽어야 합니다.

비석에서 아라본(阿羅本)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
비문에서 수도사 아라본(阿羅本, Alopen)의 이름이 등장하는 대목. 635년 그가 장안에 도착한 일을 비석은 이렇게 새겨 두었습니다. 이미지: Nestorian monk Jingjing (8th century CE)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대진’이라는 이름에 담긴 전략

비석 머리에 새겨진 십자가가 연꽃과 구름 위에 놓인 모습
비석 머리를 장식한 십자가. 십자가가 연꽃(불교의 상징) 위에 놓인 구도에서, 낯선 교리를 익숙한 동아시아의 언어로 옮긴 ‘문화 번역’의 자취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처음에 이 사원은 ‘페르시아 사원(波斯寺)’이라 불렸지만, 745년 현종 대에 ‘대진사(大秦寺)’로 이름이 바뀝니다. ‘대진(大秦)’은 본래 한대(漢代) 중국어로 로마 제국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페르시아를 뜻하는 ‘파사(波斯)’ 대신 굳이 로마를 연상시키는 ‘대진’을 택한 것을, 학자들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읽습니다. 변방의 낯선 신앙이 아니라 유서 깊은 문명에서 비롯된 가르침임을 내세운 셈입니다.

같은 전략은 비문의 문장에서도 드러납니다. 비문은 기독교 교리를 불교와 도교의 어휘를 빌려 풀어냅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신앙을 뒤섞은 혼합주의(syncretism)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 사회의 식자층 독자를 향해 낯선 교리를 익숙한 언어로 옮긴 정교한 ‘문화 번역’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 비석은 서양 기독교사의 유물이라기보다, 한 소수 종교가 당 제국의 언어와 개념을 빌려 자기 자리를 협상한 ‘중국의 종교 문서’로 다시 읽힙니다.

왼쪽 페르시아풍 돔 건축에서 출발해 사막 언덕과 산을 가로지르는 낙타 대상 행렬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고, 오른쪽 동아시아 성곽과 누각 위로 연꽃 위에 놓인 작은 십자가가 빛나는 따뜻한 흙빛 톤의 평면 일러스트
경교가 서방에서 페르시아·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전해진 과정을 양식화해 표현한 개념 도해입니다. 왼쪽 돔 건축에서 출발한 낙타 대상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성곽 위에는 연꽃 위에 놓인 십자가가 빛납니다. 낯선 교리가 동아시아의 익숙한 상징과 만난 장면을 담았습니다. 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구독) — 경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에서 동아시아로 전파된 여정을 양식화해 묘사한 그림입니다. 실제 지도·사진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개념 도해입니다.

돌을 세운 사람들

비문을 지은 이는 동방교회 성직자 경정(景淨, 시리아명 아담)이었고, 글씨는 여수암(呂秀巖)이 썼습니다. 비석 건립을 주도한 이사(伊斯)는 안사의 난 때 당의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도와 군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그 공으로 조정의 칭호를 받았다고 비문은 전합니다. 군인이자 교회 후원자였던 한 사람의 이력에서, 이 공동체가 당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가 엿보입니다. 비석은 장안, 또는 인근 주지현(盩厔縣)의 대진사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비문에 시리아 문자로 새겨진 경정의 이름 '아담'
비문 작성자 경정(景淨)의 시리아명 ‘아담(Adam)’이 시리아 문자로 새겨진 부분. 그는 한문과 시리아어 양쪽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미지: Jingjing and Lü Xiuyan (781 CE)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땅속에 묻힌 약 780년

그러나 번영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9세기 당 무종(武宗)은 회창(會昌) 연간(841~845)에 대대적인 종교 탄압, 곧 회창폐불(會昌廢佛)을 단행했습니다. 텅 빈 국고를 채우려는 재정적 동기와 외래 신앙을 배격하려는 의도가 맞물려, 표적은 불교에 그치지 않고 조로아스터교·마니교·경교 같은 외래 종교 전반으로 번졌습니다. 비석은 바로 이 무렵 박해를 피해 땅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매장 경위가 돌에 적혀 있지는 않으며, 회창폐불이라는 정황에 근거한 유력한 추정입니다.

1892년경 시안 숭인사 부근에 야외로 서 있던 비석을 찍은 옛 사진
1892년경 촬영된 비석. 재발견 뒤 한동안 시안 외곽 숭인사(崇仁寺) 부근에 야외로 서 있던 모습으로, 아래쪽에 귀부의 머리가 보입니다. 이미지: Stele text by Nestorian monk Jingjing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그렇게 이 돌은 9세기 매몰부터 명나라 말 재발견까지 약 780년을 땅속에서 보냈습니다. 앞서 말한 ‘예수회보다 약 800년 앞섰다’는 비석이 세워진 781년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고, 이 ‘약 780년’은 비석이 묻혀 있던 기간을 가리키는 별개의 셈입니다. 다시 빛을 본 것은 1620년대(대체로 1623~1625년으로 기록됩니다)에 시안 외곽 숭인사(崇仁寺) 부근에서였습니다. 비문을 알아본 이들을 통해 한문 사본이 항저우의 천주교인 이지조(李之藻)에게 전해졌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거쳐 유럽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잊혔던 동아시아 기독교사가 돌 하나의 출토로 한순간에 되살아난 것입니다.

1667년 키르허의 '중국도설'에 처음 실린 비문의 한문·시리아어 판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엮은 ‘중국도설(China Illustrata, 1667)’에 실린 비문. 비석의 한문·시리아어 본문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활자화되어 소개된 지면입니다. 이미지: Gleeson Library · CC0 · Wikimedia Commons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다시 읽다

경교를 둘러싼 흔한 오해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것은 네스토리우스라는 한 개인이었습니다. 경교 공동체 전체가 곧 ‘이단 집단’이었다는 등식은 사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이 공의회보다 앞선 424년에 이미 독립을 선언했고, 그 정죄를 받아들이지 않은 별개의 전통이었습니다. 현대 학계는 이 교회의 그리스도론이 네스토리우스 본인이 아니라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에게서 왔다고 보며, 시리아학자 세바스티안 브록은 ‘네스토리우스파’라는 명칭 자체를 개탄스러운 오칭으로 평가했습니다. 신학적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일은 이 글의 몫이 아닙니다. 다만 기록된 사실과 흔한 등식을 구별하는 일은 사료를 읽는 사람의 몫입니다. 참고로 17세기 유럽에서 제기된 위작설은 19세기에 학술적으로 정리되어, 오늘날 비석의 진품성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청대에 제작된 경교 비석 탁본
청대(大淸)에 제작된 경교 비석 탁본. 이런 탁본을 통해 비문은 원석을 떠나서도 폭넓게 전해지고 연구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Unknown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기억해 둘 것은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동아시아 전래는 16세기 서양 선교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635년 실크로드를 건너온 동방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약 780년을 땅에 묻혀 있었을 뿐입니다. 돌 하나가 다시 올라오자, 한 대륙의 종교사가 그만큼을 거슬러 복원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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