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과 무중력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로봇 팔이 물체를 붙잡으려 할 때, 지구에서 익숙한 방법은 대부분 무용지물이 됩니다. 흡착판은 안팎의 기압 차이로 달라붙는데 진공에는 애초에 기압이 없고, 접착제나 테이프도 얼어붙은 진공 속에서 거의 즉시 말라붙어 굳어버립니다. 인공위성 부품이나 우주 파편처럼 매끄럽고 불규칙한 물체를, 손잡이 하나 없이 붙잡으려면 어떤 방법이 남을까요.

게코의 발바닥에서 빌려온 해법
공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도마뱀붙이(게코)의 발바닥이었습니다. 게코는 유리처럼 매끄러운 수직면도 접착제 없이 오르내리는데, 이 접착의 핵심이 반데르발스 힘, 즉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미세한 인력이라는 사실이 실험으로 규명됐습니다. Kellar Autumn 등이 2002년 PNAS에 발표한 연구는 톡케이도마뱀붙이의 발 구조 실험을 통해 모세관(수분층)이나 화학적 분비물 가설을 배제하고 반데르발스 힘이 지배적 메커니즘임을 밝혔고, 앞서 2000년 Nature 논문에서는 같은 연구팀이 강모 한 가닥의 접착력을 세계 최초로 직접 측정했습니다.

50만 개의 털끝, 그리고 반데르발스 힘
게코의 발바닥 하나에는 강모(seta)라 불리는 미세한 털이 약 50만 개 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강모 끝은 다시 약 0.2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주걱(spatula) 구조로 갈라져, 표면과 닿을 때마다 반데르발스 힘을 냅니다. 강모 한 가닥의 접착력은 사전하중 조건에서 약 20~40마이크로뉴턴으로 측정됐고(밀도 수치는 자료마다 편차가 있어 유보적으로 봐야 합니다), 이 무수한 접점이 함께 작용해 게코 한 마리는 이론상 체중의 약 50배까지 지탱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스탠퍼드의 스티키봇, JPL의 우주용 그리퍼
이 원리를 처음 공학용 “지향성 접착재(directional adhesive)”로 구현한 곳은 스탠퍼드 대학교 Mark Cutkosky 교수의 연구실이었습니다. 이 연구실의 등반로봇 스티키봇은 2006년 무렵 매끄러운 수직면을 접착제 없이 오르기 시작했고, 관련 논문은 2008년 IEEE 로보틱스 학술지에 발표됐습니다. 이 기술을 우주로 옮긴 곳은 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입니다. 2010년 JPL에 합류한 Aaron Parness 팀은 영하 60도·완전 진공을 모사한 챔버 시험을 통과시켰습니다.

지상에서 궤도 근처까지, 단계별 실증
이후 실증은 단계적으로 진행됐습니다. 2014년 포물선 비행기 C-9B 시험에서 20파운드 큐브와 250파운드 패널을 붙잡는 데 성공했고, 2016년엔 접착 샘플 5개를 ISS로 보내 미세중력 속 장기 성능을 시험했습니다. 2017년 Science Robotics에 실린 스탠퍼드·JPL 공동 연구는 지상 에어베어링 시설에서 300킬로그램급 로봇을 견인하고, 약 80회 포물선 비행에서 큐브와 대형 비치볼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만 논문 스스로 “다음 단계는 정거장 외부 시험 준비”라 밝혀, ISS 선외 시험조차 아직임을 명시합니다.

ISS 안에서, Astrobee와 함께
실제 ISS 내부에서 로봇에 장착돼 시연된 사례는 따로 있습니다. JPL 계열과는 별도로 스탠퍼드 Cutkosky·Pavone 연구실이 개발한 게코 그리퍼가 NASA 에임스(Ames)의 자유비행 로봇 Astrobee용으로 제작돼 2019년 ISS로 발사됐습니다. 2021년 4월 9일과 15일, 우주비행사 Kate Rubins와 Victor Glover가 이를 Astrobee(애칭 “허니”)에 장착해 파지력을 재고, Astrobee가 그리퍼만으로 벽까지 비행해 정지를 시도하는 시험을 여압 캐빈 안에서 수행했습니다. 실제 궤도상 우주 쓰레기 포획 임무는 수행이 확인되지 않으며, JPL의 궤도 파편 페이지도 “붙잡아 포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건법으로 목표만 제시합니다. 지구 저궤도의 10센티미터 이상 파편은 2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흡착판과 접착제가 우주에서 실패하는 이유
진공에는 대기압이 없어 흡착판의 압력차 원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접착제·테이프는 경화·아웃개싱으로 곧 굳어버립니다. 반면 반데르발스 힘에 기반한 게코 접착은 화학적 경화 과정이 없어 온도·압력·방사선 변화에 근본적으로 둔감하다는 점이 우주에 적합한 이유로 꼽힙니다.
지상으로 돌아온 산업용 그리퍼
이 원리는 지상 산업으로도 돌아왔습니다. JPL 기술을 상용화한 그리퍼(OnRobot)는 접착 압력을 기존 4~5킬로파스칼에서 35~40킬로파스칼로 끌어올려 약 6.4킬로그램짜리 금속판을 들어 올렸고, DARPA 자금의 “피닉스 게코 그리퍼”는 JPL의 우주급 접착재와 순응형 캡처 헤드를 결합해 폐기 위성 정비용 그리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문어 빨판을 본뜬 연체 그리퍼 등 다른 생체모방 접근도 있지만 대개 수중·지상용이어서, 반데르발스 접착이 우주에서 갖는 특이함이 오히려 두드러집니다.

정교한 설계를 뒤늦게 읽어낸 공학
게코의 발바닥은 정교하게 설계된 접착 구조였고, 그 반데르발스 원리가 온도·압력·방사선 변화에 근본적으로 둔감하다는 사실을 인간의 우주공학은 오랜 관찰과 실험 끝에야 알아내 그리퍼에 옮겨 담고 있는 셈입니다. 흡착판도 접착제도 무력해지는 우주 공간에서, 작은 도마뱀의 발끝에 새겨진 물리학이 로봇의 손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 NASA JPL Robotics – Gecko Gripper
- NASA JPL Robotics – Gecko-like Adhesives for Orbital Debris Applications
- NASA JPL Robotics – Phoenix Gecko Gripper
- NASA JPL News – Gecko Grippers Get a Microgravity Test Flight (2014)
- NASA JPL News – Gecko Grippers Moving On Up (2015)
- Stanford News – 'Gecko gripper' tested aboard ISS (2021)
- Stanford News – Engineers design a robotic gripper for cleaning up space debris (2017)
- PNAS 2002 – Evidence for van der Waals adhesion in gecko setae (Autumn et al.)
- Nature 2000 – Adhesive force of a single gecko foot-hair (Autumn et al.)
- NASA Spinoff – New Industrial Robotic Gripper Copies Geckos' T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