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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 파란색은 색소가 아니다

블루베리를 손끝으로 살짝 문질러본 적이 있는가. 매끈해 보이던 짙은 남색 표면에 뿌옇게 앉아 있던 흰빛 가루층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붉은 자주색에 가까운 껍질이다. 흔히 마트 매대에서 매일 만나는 이 작은 열매의 파란색은, 사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짐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블루베리의 파란색은 색소가 아니다. 안토시아닌이라는 껍질 색소는 오히려 짙은 빨강~자주색에 가깝고, 우리 눈에 파랗게 보이는 색은 표면을 얇게 덮은 왁스층의 미세한 결정 구조가 청색과 자외선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만들어 내는 구조색이다.

짙은 남색 블루베리 여러 알이 화면 가득 쌓여 있고 표면에 뿌연 회백색 가루층(블룸)이 뚜렷하게 덮여 있다
블루베리 표면을 뒤덮은 뿌연 흰 가루층, 블룸의 클로즈업 — 이 층의 무작위 나노결정이 청색과 자외선을 흩뿌려 파랗게 보이게 한다
사진 · Famartin,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색소를 벗겨보면 드러나는 진짜 색

블루베리 껍질 속에는 실제로 색소가 있다. 안토시아닌이라는 수용성 페놀 화합물로, 사과·포도·자두 같은 여러 과일에서 흔히 발견되는 흔한 색소다. 문제는 이 색소 자체의 색이다. 껍질을 이루는 세포에 들어 있는 안토시아닌은 짙은 빨강에서 자주색에 가까운 빛을 낸다. 실제로 블루베리 껍질을 문질러 표면의 흰 가루를 벗겨내거나 과육을 눌러 즙을 내보면, 붉은 자주색 계열이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매대에서 보는 짙은 남보라색, 이른바 ‘블루베리 블루’는 이 색소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가지에 매달린 블루베리 열매 세 알과 아직 덜 익은 연두색 열매 한 알이 함께 있고, 익은 열매 표면에는 뿌연 블룸이 옅게 덮여 있다
가지에 달린 블루베리 — 아직 덜 익은 연두색 열매(왼쪽 위)와 블룸이 옅게 앉은 익은 열매가 한 가지에 함께 자란다
사진 · Darkone, CC BY-SA 2.5, Wikimedia Commons

왁스를 녹이면 색이 통째로 사라진다

그 답의 절반은 껍질 표면을 얇게 덮은 흰 가루, 이른바 ‘블룸(bloom)’이라 불리는 왁스층에 있다. 2024년 학술지 Science Advances에 실린 브리스톨대학교 연구진의 논문은 이 블룸의 정체를 실험으로 하나씩 벗겨냈다. 연구진은 먼저 블루베리 표면의 왁스를 긁어내 클로로포름 용매에 녹였다. 결과는 뚜렷했다. 녹은 왁스 용액은 가시광선 영역 전체에서 투명했다 — 즉 왁스 자체에는 색을 내는 색소 성분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색소라면 녹여도 그 색이 용액에 남아야 하는데, 왁스는 녹는 순간 색을 완전히 잃었다.

다시 굳히면 파란색이 돌아온다

진짜 흥미로운 대목은 다음 단계다. 연구진은 녹인 왁스 2mg을 알루미늄 도가니에 담아 진공 상태에서 섭씨 120도까지 가열한 뒤, 그 온도를 30분에서 1시간가량 유지하며 다시 굳혔다. 그러자 원래 색이 전혀 없던 투명한 도가니 표면에 블루베리 겉면에서 보던 것과 같은 청색-자외선 계열의 반사색이 다시 나타났다. 색소가 아니라 왁스 분자들이 스스로 미세한 결정 구조로 재조립되면서 만들어진 색이라는 사실을, 녹였다가 다시 굳히는 재현 실험으로 직접 입증한 셈이다.

규칙 없이 쌓인 나노결정이 빛을 흩뿌린다

그렇다면 이 왁스 결정은 어떻게 색을 만들어낼까. 연구진이 전자현미경으로 블룸의 미세구조를 들여다보니, 두께 2~4마이크로미터 안팎의 얇은 층에 나노미터 크기의 결정 알갱이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 결정들은 촘촘한 격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았다. 연구진이 구조를 분석한 결과 인접한 입자 사이에 일정한 간격, 즉 주기성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특정 파장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반사 피크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색은 규칙적으로 층이 쌓여 만들어지는 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 즉 무작위(비주기적) 배열에 의한 산란으로 만들어진다. 짧은 파장인 청색과 자외선이 이 불규칙한 나노결정들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면서, 우리 눈에는 파랗게 보이는 반사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블루베리 한 알과 반으로 자른 단면이 나란히 놓여 있다. 겉껍질은 짙은 청보라색이고 잘린 단면의 과육은 연한 초록색이다
블루베리 겉껍질(청보라색)과 반으로 자른 속 과육(연초록색)의 색 차이 — 안토시아닌 색소는 과육이 아니라 껍질에 몰려 있다
사진 · Slashme, CC0, Wikimedia Commons

산란만으로는 파랑이 나오지 않는다 — 2층 구조의 비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무작위로 흩어진 나노결정이 청색과 자외선을 산란시킨다면, 안토시아닌 색소는 대체 왜 필요한 걸까. 답은 구조색이라는 현상 자체의 성질에 있다. 왁스층이 만들어내는 산란은 빛을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되돌려 보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비흡수성 산란만으로는 채도 높은 파랑이 나오지 않는다. 흰 종이 위에 같은 왁스 구조를 얹으면 산란된 청색광이 다른 파장의 빛과 뒤섞여 뿌옇게 씻겨 나가면서 흰색에 가까운 색으로 보이게 된다. 연구진은 구조로 만들어지는 색은 그 아래에 빛을 흡수하는 어두운 배경이 있어야만 색으로 성립한다고 설명한다. 블루베리 껍질에서 바로 이 흡수 배경 역할을 하는 것이 짙은 빨강~자주색의 안토시아닌 색소층이다. 안토시아닌 층이 산란되지 않은 나머지 파장의 빛을 흡수해 배경을 어둡게 눌러주기 때문에, 그 위에서 산란된 청색-자외선 빛만 채도 높은 파랑으로 도드라져 보인다. 즉 안토시아닌은 파란색과 무관한 색소가 아니라, 오히려 이 구조색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블루베리 겉껍질은 위쪽의 무작위 나노결정 산란층과 아래쪽의 안토시아닌 흡수층이 함께 작동하는, 정교하게 설계된 2층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블루베리 껍질 2층 구조 단면 개념도
블루베리 표면의 2층 구조: 위쪽 왁스 블룸의 무작위 나노결정이 청색과 자외선을 산란시키고, 아래쪽 짙은 안토시아닌층이 흡수 배경 역할을 한다
도해 · glu.kr 자체 제작(Middleton et al. 2024 연구 기반 개념도)

블루베리만의 일이 아니다

이런 왁스 블룸은 블루베리에게만 있는 특별한 장치가 아니다. 포도알 표면의 뽀얀 가루, 자두나 케일 잎의 뿌연 광택, 다육식물과 청색가문비나무(blue spruce)의 은은한 청백색 겉면도 모두 표피(각피)를 이루는 왁스가 미세한 결정 구조로 스스로 조립되면서 만들어내는 같은 계열의 현상이다. 실제로 2024년 논문의 제목도 블루베리 한 종이 아니라 ‘과일 왁스 블룸(fruit wax bloom)’ 전반을 다루고 있다. 포도알 왁스 블룸이 표피 결정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힌 별도의 학술 연구도, 이 왁스 산란 현상이 여러 식물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 계열임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여러 과일과 식물의 뿌연 흰빛 겉면 상당수가, 사실은 색소가 아니라 나노 단위의 광학 장치라는 뜻이다.

왜 하필 파랑일까 — 조심스러운 가설

그렇다면 왜 굳이 청색과 자외선을 산란시키는 방향으로 이런 구조가 자리 잡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답이 없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시각에 의존해 먹이를 찾는 새 같은 종자 산포자들에게 파란색이 유난히 눈에 띄는(chromatically salient)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열매를 눈으로 찾아 먹고 씨앗을 퍼뜨리는 동물들에게 파란색이 다른 배경색과 잘 구분되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추정이다. 다만 이는 아직 검증이 더 필요한 가설 단계이며, 왁스 블룸의 원래 기능으로 흔히 거론되는 수분 증발 억제나 병원균 차단 같은 역할과 함께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흰색 종 모양 꽃이 점점이 피어 있는 잎이 무성한 블루베리 관목 가지
재배 블루베리(Vaccinium corymbosum) 관목 — 잎이 무성한 가지에 흰 종 모양 꽃이 피어 있다
사진 · Michel Langeveld,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블루베리 가지 하나에 초록색 덜 익은 열매와 파랗게 익어 블룸이 앉은 열매가 송이로 함께 달려 있다
한 가지에 송이로 달린 블루베리 — 초록빛 미숙과부터 블룸이 덮인 다 익은 파란 열매까지, 익어가는 여러 단계가 한눈에 보인다
사진 · Glysiak, CC BY 4.0, Wikimedia Commons

흔한 열매가 된 지는 100년 남짓

지금은 마트에서 사시사철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재배종 블루베리, 즉 하이부시 블루베리(Vaccinium corymbosum)는 사실 오래전부터 널리 재배되던 작물이 아니었다. 이 열매는 북미가 원산지이며, 야생에서 채집하던 열매를 재배 가능한 작물로 바꾸어 놓은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미국 농무부(USDA) 식물학자 프레더릭 코빌(Frederick Vernon Coville, 1867~1937)은 1905년 뉴햄프셔주에 마련한 농장에서 실험을 시작해, 1906년부터 1910년 사이 블루베리가 산성 토양(pH 약 4.5~4.8)에서만 자란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 토양 조건 규명이 채집 작물이던 블루베리를 재배 가능한 작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 돌파구였다. 이후 코빌은 1911년부터 뉴저지주 화이츠보그의 원예가 엘리자베스 콜먼 화이트(Elizabeth Coleman White)와 협력을 시작했다. 화이트는 인근 채집인과 주민들을 동원해 열매가 유난히 큰 야생 관목을 찾아 표시하게 한 뒤, 이를 직접 수집해 코빌에게 육종 모본으로 제공했다. 두 사람의 협력은 코빌이 세상을 떠난 1937년까지 26년 가까이 이어졌고, 그 결과 1916년에는 통제 교배와 관리 재배를 거친 첫 하이부시 블루베리가 상업적으로 출하되었다.

흰색과 연분홍색이 섞인 종 모양 블루베리 꽃 여러 송이가 가지에 매달려 있다
블루베리 꽃 — 종 모양의 흰 꽃송이가 가지에 매달려 피어 있다. 열매의 파란빛이 만들어지기 전, 개화 단계의 모습이다
사진 · Rasbak,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한국의 ‘토종 블루베리’는 다른 종이다

한국에도 산앵도나무속(Vaccinium)에 속하는 자생 식물이 있다. 중남부 산지에 자라는 정금나무(Vaccinium oldhamii)와 제주 한라산이나 북부 고산지대에 자라는 들쭉나무(Vaccinium uliginosum)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정금나무는 환경부가 국외반출승인대상종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다만 이 나무들이 마트에서 파는 재배 블루베리와 같은 종은 아니다. 재배 블루베리(Vaccinium corymbosum)는 앞서 살펴본 대로 북미가 원산지이며, 정금나무와 들쭉나무는 이와는 별개의 종이다. 두 식물 모두 같은 산앵도나무속에 속할 뿐, ‘한국 토종 블루베리’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같은 속에 속한 친척 나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흔한 열매 속의 정교한 나노구조

매일 아침 식탁에 오르는 작은 열매 하나에도 이렇게 정교한 광학 장치가 숨어 있다. 안토시아닌이 만드는 짙은 흡수 배경과, 그 위에서 무작위로 쌓인 나노결정이 청색과 자외선을 흩뿌리는 산란층. 이 2층 구조의 설계 원리를 알고 나면, 다음에 블루베리를 손끝으로 문질러 볼 때 그 뿌연 가루가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던 나노 단위 구조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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