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은행나무: 공룡보다 오래된 ‘살아있는 화석’

가을이면 거리마다 황금빛 부채꼴 잎이 깔립니다. 너무 흔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가로수지만, 이 나무 한 그루는 공룡이 등장하기도 전부터 이어져 온 까마득한 계통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우리가 매년 밟고 지나가는 은행잎은, 사실 2억 년 넘게 모습을 거의 바꾸지 않은 ‘살아있는 화석’의 잎입니다.

역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부채꼴 은행잎
역광을 받은 은행잎 한 장. 부채꼴(扇形) 잎몸 가운데가 둘로 갈라진 결각이 은행나무 특유의 모습이다.
Fargoh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 출처

2억 년을 견딘 잎, 단 한 종의 생존자

은행나무가 속한 은행나무목(Ginkgoales)의 가장 오래된 화석 기록은 프랑스의 페름기 최초기(약 2억 9,900만~2억 9,300만 년 전) 지층에서 발견된 Trichopitys 속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계통은 페름기부터 트라이아스기에 걸쳐 번성하며 한때 약 15개 속에 이르는 다양한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백악기 말, 꽃식물(속씨식물)이 빠르게 세상을 뒤덮으면서 은행나무목의 거의 모든 식물이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지구에 살아남은 것은 오직 은행나무(Ginkgo biloba) 단 한 종뿐입니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강·은행나무목·은행나무과·은행나무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이며, 독립된 식물문 Ginkgophyta 전체를 홀로 대표합니다. 분류학적으로 이토록 외롭게 고립된 생물은 드뭅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쥐라기 은행류 화석 잎이 박힌 암석 표본
중기 쥐라기(약 1억 7천만 년 전) 은행류 화석 Ginkgo huttonii(영국). 잎의 부채꼴 윤곽이 오늘날 은행잎과 거의 다르지 않다.
Daderot · CC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이유는 잎에 있습니다. 영국 요크셔의 쥐라기 지층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Ginkgo huttonii의 화석 잎은 단순한 4엽 구조와 방사형 맥상을 보여 현생 은행잎과 뚜렷이 닮았습니다. 또 팔레오세 무렵 북반구에 남았던 Ginkgo adiantoides의 잎은 현생 은행잎과 사실상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화석으로 확인되는 이 오랜 형태적 정체(morphological stasis), 곧 잎의 모습이 최소 2억 년 이상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의 대표로 만든 핵심 근거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잎만이 아닙니다. 프랑스 트라이아스기 중기(약 2억 4,000만 년 전) 사암층에서 발굴된 은행류 유식물 화석 20점은 발아와 어린싹의 발달 양식까지 현생 은행나무와 ‘거의 동일’했습니다. 씨앗이 싹트는 방식조차 중생대 이래 그대로 이어져 온 셈입니다.

부채꼴 잎과 차상맥, 겉씨식물의 독자성

은행잎을 자세히 보면 잎맥이 한 점에서 시작해 거듭 둘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차상맥(이분맥, dichotomous venation)이라 부릅니다. 이 잎맥은 결코 다시 만나 그물망을 이루지 않는데, 이런 순수한 차상맥 구조는 현존하는 종자식물 가운데 은행나무에서만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여름 가지에 달린 초록빛 부채꼴 은행잎들
여름 가지에 달린 초록빛 은행잎. 잎맥이 한 점에서 부챗살처럼 두 갈래로 거듭 갈라지는 차상맥(叉狀脈)이다.
MONGO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 출처

은행나무는 씨가 겉으로 드러나는 겉씨식물(나자식물)이지만, 침엽수나 소철류·마황류와도 구별되는 독자적인 분류군에 속합니다. 침엽수의 바늘잎과도, 소철의 깃꼴잎과도 다른 이 부채꼴 잎은, 오래전 사라진 한 계통의 마지막 증언인 셈입니다.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와 추카리니가 19세기에 펴낸 『일본 식물지(Flora Japonica)』에도 은행나무의 잎과 생식기관이 정밀한 도판으로 실렸습니다.

19세기 일본 식물지에 실린 은행나무 잎과 생식기관 세밀화
지볼트와 추카리니의 『일본 식물지(Flora Japonica, 19세기)』에 실린 은행나무 도판. 잎과 생식기관을 함께 그렸다.
Philipp Franz von Siebold and Joseph Gerhard Zuccarini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 출처

헤엄치는 정자와 ‘열매가 아닌’ 종자

은행나무의 번식 방식에는 고대 식물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자웅이주)여서, 수나무는 화분추를 만들고 암나무는 줄기 끝에 밑씨 두 개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1896년, 일본 도쿄대학의 히라세 사쿠고로(平瀬作五郎)가 은행나무 밑씨에서 편모로 헤엄치는 운동성 정자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이 정자는 약 1,000개의 편모를 두르고 크기가 250~300마이크로미터에 이릅니다. 단 하나의 꼬리를 가진 인간 정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현존하는 종자식물 가운데 이렇게 헤엄치는 정자를 지닌 무리는 은행나무와 소철뿐입니다. 정자가 물속을 헤엄쳐 수정하던 먼 옛날의 방식을, 은행나무는 씨앗 안에서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은행 열매’라 부르는 가을의 노란 알갱이도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겉씨식물인 은행나무는 씨방이 없어 진정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노란 구조물은 식물학적으로 열매가 아니라 종자이며, 물렁한 외종피(sarcotesta)와 단단한 석종피(sclerotesta)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채꼴 잎 사이로 가지에 달린 노란 은행 종자 두 알
가지에 달린 은행 종자. 살구처럼 보이는 물렁한 노란 겉껍질은 씨를 감싼 외종피로, 익으면 부티르산 탓에 고약한 냄새가 난다.
H. Zell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 출처

가을마다 길에서 풍기는 그 강렬한 악취의 정체는 외종피에 든 부티르산(낙산)입니다. 상한 버터나 구토물에서 나는 냄새 성분과 동일한 화합물이죠. 반면 종자 안쪽의 영양 조직(겉씨식물에서는 암배우체에 해당), 곧 우리가 먹는 ‘은행알’은 가열하면 반투명해지며 식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과다 섭취하면 징코톡신(4’-O-메틸피리독신)에 의한 중독이 생길 수 있어, 특히 어린이는 많이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천 년을 견디는 나무, 사람과 함께 살아남다

은행(銀杏)이라는 이름은 ‘은빛 살구’라는 뜻입니다. 씨앗 모양이 살구를 닮았고 표면이 은빛 흰 가루로 덮여 있어 붙은 이름이지요. 또 다른 별명인 공손수(公孫樹)에는 이 나무의 느린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씨앗을 맺기까지 약 30년이 걸려,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 대에 이르러서야 열매를 본다는 뜻입니다. 학명 Ginkgo는 1712년 독일인 의사 엥겔베르트 캠퍼가 일본어 ‘긴쿄’를 로마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잘못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고, 훗날 린네가 그대로 받아들여 공식 학명으로 굳어졌습니다.

가을에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한 그루 전체 모습
가을이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 한 그루(미국 메릴랜드). 곧게 선 줄기와 원뿔에 가까운 수형이 특징이다.
Acroterion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 출처

느리게 자라는 만큼 은행나무는 오래 삽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는 추정 수령 약 1,100년, 높이 38.8m, 밑둥 둘레 14m로 한국에서 가장 크고 높은 은행나무입니다. 조선 세종 때는 당상직첩(정3품) 벼슬이 내려졌다는 이야기까지 전합니다. 천 년 세월을 한자리에서 견뎌 온 거목 앞에 서면, 시간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한 사람이 곁에 선 거대한 노거수 은행나무 줄기
사람과 견주어 본 노거수 은행나무의 거대한 밑동. 은행나무는 수천 년을 사는 대표적 장수목이다.
Jean-Pol GRANDMONT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은행나무의 생명력은 극한의 시련 속에서도 빛났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폭심으로부터 약 1,130~2,160m 안에 있던 은행나무 여섯 그루가 극열과 방사선을 견디고 살아남았습니다. 이듬해 봄 새싹을 틔운 이 나무들은 ‘희망의 상징(히바쿠 주모쿠)’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흔해 보이는 나무가 실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멸종위기종으로 올라 있습니다. 진정한 야생 개체군은 중국 남서부 달루(大婁) 산맥이나 저장성 톈무산(天目山) 같은 극소수 지역에만 남아 있습니다. 톈무산의 반야생 은행나무 244그루는 가파른 암반과 절벽 가장자리 같은 자연 서식지에 자라지만, 약 1,000년 전 불교 승려들이 사원 인근에 심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워 진짜 야생인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2019년 Nature Communications에 실린 545개 게놈 분석 연구는 중국 안에서 세 곳의 빙하기 피신처를 확인하는 한편, 인간의 종교·문화적 관행이 은행나무의 확산과 생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유전적으로 밝혀냈습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 늘어선 가로수길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길. 가을이면 잎이 거의 한꺼번에 떨어져 황금빛 융단을 이룬다.
Crusier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오늘날 도시 거리를 채운 은행나무는 모두 사람이 번식시킨 것입니다. 공해와 중금속을 견디는 자정 능력이 뛰어나고, 곤충이 기피하는 성분을 내뿜어 병해충에 강하며, 그늘과 경관과 내구성까지 두루 갖춰 전 세계 도시가 가로수로 선택했습니다. 야생에서 거의 사라진 이 나무가 정작 거리에서는 가장 흔한 풍경이 된 것은, 인간과 나무가 서로를 살린 오랜 동행의 결과입니다.

시간을 견딘 설계

은행나무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하나는 2억 년 넘게 거의 변하지 않고도 살아남은 ‘시간을 견딘 설계’이고, 다른 하나는 야생에서 위태로워진 그 생명을 사람의 손이 거리마다 이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매년 가을 발밑에 쌓이는 황금빛 잎 한 장에, 까마득한 지질시대의 기억과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천 년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깊고 오래된 생명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창조 세계가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경이입니다.

참고 자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