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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무엇을 지키고 어디서 멈추나 — 개념의 역사와 경계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국민의회가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1조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말하고 쓰고 인쇄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아무 조건 없는 자유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같은 조문은 곧바로 단서를 붙입니다. “다만 법이 정한 경우에는 이 자유의 남용에 대해 책임을 진다.”(예일 애벌런 프로젝트) 표현의 자유를 근대 인권 문서의 한복판에 새겨 넣은 이 조문은, 자유와 그 경계를 한 문장 안에 함께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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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을 든 여인과 날개 달린 인물 사이 돌판에 프랑스어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목이 새겨진 그림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그린 그림의 윗부분. 끊어진 쇠사슬을 든 여인과 홀을 든 날개 달린 인물 사이에 선언의 제목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림: 장자크프랑수아 르바르비에(추정) · 사진: Localcosmos · CC0 · Wikimedia Commons

이 글은 두 가지를 묻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무엇을 지키려고 생겨났을까요? 그리고 그 자유는 어디서 멈출까요? 아테네의 민회에서 영국의 인쇄소, 스웨덴 의회와 미국 연방대법원, 유엔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까지 따라가 보면, 두 물음이 거의 언제나 함께 나타납니다.

생각은 묶을 수 없고, 표현은 책임을 진다

오늘날 국제 규범은 표현의 자유를 몇 겹의 권리로 나누어 적습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19조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국경에 관계없이 어떤 매체로든 정보와 사상을 구하고, 받고, 전할 자유”를 함께 보장합니다(유엔). 1966년의 자유권규약은 이 둘을 아예 다른 항으로 떼어 놓았습니다. 제19조 제1항은 의견을 가질 권리를, 제2항은 표현의 자유를 적고, 제한을 허용하는 제3항은 제2항의 권리에만 걸립니다(OHCHR). 마음속 생각은 어떤 이유로도 건드릴 수 없지만, 밖으로 나온 말과 글은 일정한 조건에서 제한될 수 있다는 구분입니다.

제한의 근거를 문서들은 비슷한 말로 적습니다. 자유권규약은 표현의 자유가 “특별한 의무와 책임”을 수반한다고 하고, 1950년 유럽인권협약 제10조도 “의무와 책임”을 들어 법률로 정한 필요한 제한을 허용합니다(OHCHR; 유럽평의회). 프랑스 선언이 말한 ‘남용에 대한 책임’과 같은 계열입니다. 눈에 띄는 예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입니다. “의회는 … 언론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문구에는 아무 단서가 없습니다(미 국가기록원). 그러나 뒤에서 보듯 미국 연방대법원도 처벌할 수 있는 선동의 범위를 판례로 정해 왔습니다. 결국 다툼은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경계를 어디에 긋느냐에서 벌어집니다.

아테네의 두 낱말: 이세고리아와 파레시아

표현의 자유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흔히 고대 아테네가 등장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프닉스 언덕에 모여 민회를 열었고, 이곳에서 이름난 연설가들의 발언을 들었습니다(브리태니커). 그리스인에게는 말의 자유를 가리키는 낱말이 둘 있었습니다. ‘이세고리아(isegoria)’는 민회나 평의회 같은 공식 기구에서 자격을 갖춘 시민이 동료들과 똑같이 발언할 권리를 뜻했습니다. ‘파레시아(parrhesia)’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말하는’ 자유였는데, 정치 기구보다 오히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무대에서 꽃피었습니다(안티고네 저널). 오늘날 말로 옮기면 앞의 것은 ‘평등한 발언권’에, 뒤의 것은 ‘기탄없는 발언’에 가깝습니다.

햇빛을 받은 바위를 깎아 만든 돌계단 연단 너머로 언덕 위 아크로폴리스와 리카베투스산이 보이는 풍경
아테네 프닉스 언덕의 연단(베마).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 너머로 아크로폴리스와 리카베투스산이 보입니다. 2018년 촬영.
사진: George E. Koronaios · CC0 ·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이 개념을 곧장 현대의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으로 보면 과장입니다. 민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은 자격을 갖춘 성인 남성 시민이었고, 여성과 노예, 외국인 거주자(메틱)는 그 자리에 설 수 없었습니다. 이세고리아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지키는 방패라기보다, 공동체의 결정에 참여하는 시민의 자격에 묶여 있었습니다. 말 때문에 재판을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대표적이지만, 이런 재판은 규칙이라기보다 예외였다고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안티고네 저널). 표현의 자유가 걸어온 길은 이런 단절과 재정의의 연속이었지, 고대부터 오늘까지 곧게 이어진 하나의 선이 아니었습니다.

인쇄기와 검열, 그리고 밀턴

근대적 의미의 표현의 자유는 인쇄기와 함께 첨예해졌습니다. 1643년 영국 의회는 모든 책이 출간 전에 정부의 승인과 허가를 받게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듬해인 1644년, 시인 존 밀턴은 이 허가제에 항의하는 글 『아레오파기티카』를 펴냈습니다. 제목은 아테네의 최고 법정이 자리했던 ‘아레스의 언덕(아레오파고스)’에서 따왔습니다. 밀턴은 허가제를 강요하는 일이 교황청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거짓을 미리 막으려는 시도는 진리의 힘을 얕보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브리태니커). 정작 이 글 자체도 허가 없이 출간되었습니다.

AREOPAGITICA라는 큰 제목과 영어 부제, 1644년 런던 인쇄 표기가 있는 오래된 책 표지
1644년 존 밀턴이 허가 없이 펴낸 『아레오파기티카』 표지. 출간 전 허가제에 맞서 ‘무허가 인쇄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대영도서관 소장본을 1917년에 사진 복제한 판본입니다.
원저자: John Milton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영어권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대표 고전으로 꼽히지만, 이 글의 당장의 목표였던 허가제 폐지는 그 뒤로 5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브리태니커). 허가제는 왕정복고 뒤 1662년 인쇄법으로 다시 굳어졌고, 1695년 5월 하원이 이 법의 갱신을 거부하면서 영국의 출간 전 검열이 비로소 끝났습니다(저작권 역사 1차 사료). 사상의 씨앗이 곧바로 제도로 자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법전에 들어간 자유: 스웨덴과 미국

제도의 변화는 더디게 왔습니다. 1689년 영국 권리장전은 ‘의회 안에서의 발언과 토론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이는 의원의 특권이었지 일반 시민의 표현의 자유는 아니었습니다(영국 법령집). 성문법으로 먼저 나아간 곳은 스웨덴이었습니다. 1766년 12월 2일 스웨덴 의회가 통과시킨 출판자유법은 학술·신학 서적을 뺀 모든 인쇄물의 검열을 없애고, 정부 기관이 작성한 문서를 시민이 볼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다만 국가나 국왕을 비판하는 글에 대한 무거운 처벌은 그대로 두었고, 통제의 책임을 검열관에게서 출판업자에게로 옮겼습니다(브리태니커). 흔히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세계 최초의 표현의 자유 보장으로 여기지만, 스웨덴의 법이 그보다 25년 앞섭니다.

펼쳐진 낡은 책의 오른쪽 면에 18세기 스웨덴어 필기체로 쓴 문서 제목과 1766년 12월 2일 날짜가 보이는 모습
1766년 12월 2일 공포된 스웨덴 「글쓰기와 출판의 자유에 관한 왕령」. 스웨덴 국립기록원이 소장한 원본 왕령집의 해당 면입니다.
작성: 스웨덴 국왕 상서국(Kunglig Majestäts kansli) · 퍼블릭 도메인 · 제공: 스웨덴 국립기록원 · Wikimedia Commons

미국의 권리장전은 1791년 12월 15일 비준되었습니다. 1789년 9월 25일 제1차 연방의회는 12개의 수정안을 각 주에 제안했는데, 표현의 자유를 담은 조항은 그 목록에서 ‘세 번째 조항’이었습니다. 앞의 두 조항이 당시 비준되지 못하면서 세 번째부터 열두 번째까지 10개 조항이 권리장전이 되었고, 세 번째 조항은 ‘수정헌법 제1조’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조항은 203년 뒤인 1992년에야 비준되어 제27조가 되었습니다(미 국가기록원). 미국 헌법은 국가가 개인의 표현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못 박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프랑스 선언이 자유와 책임을 나란히 적은 방식과는 결이 다르며, 이 차이는 훗날 경계선을 둘러싼 갈림길로 이어집니다.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라는 필기체 제목 아래 Article the first부터 Article the twelfth까지 조항이 손글씨로 적힌 누렇게 바랜 양피지 문서
1789년 9월 25일 연방의회가 각 주에 제안한 12개 수정안의 원본. 표현의 자유는 ‘Article the third(세 번째 조항)’에 적혀 있고, 비준 뒤 수정헌법 제1조가 되었습니다.
사진: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밀의 위해 원칙과 ‘사상의 시장’

19세기에 들어 표현의 자유는 철학적 토대를 얻습니다. 185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이른바 위해 원칙을 내놓았습니다. “문명사회의 어느 구성원에게든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타인에 대한 위해를 막는 것이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다룬 제2장에서 밀은, 누구도 진리를 다 알지 못하므로 어떤 생각을 억누르는 일은 진리를 억누르는 일일 수 있고, 틀린 의견조차 진리를 시험해 독단으로 굳지 않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MTSU 수정헌법 제1조 백과).

짙은 정장에 리본 넥타이를 맨 대머리 노신사가 정면을 바라보는 흑백 초상 사진
1870년 무렵의 존 스튜어트 밀. 1859년 『자유론』에서 타인에 대한 위해를 막는 것만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정당한 이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진: London Stereoscopic Company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그런 밀도 선을 그었습니다. 『자유론』 제3장에서 그는 “곡물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이라는 의견을 예로 듭니다. 이 의견이 신문을 통해 퍼질 때는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밀은 적었습니다. 그러나 곡물상의 집 앞에 모여든 흥분한 군중에게 입으로 외치거나 벽보로 나눠 줄 때는 처벌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자유론』 원문). 같은 문장이라도 언제, 누구 앞에서, 어떤 결과를 부르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장면은 백여 년 뒤 미국 연방대법원이 세운 기준과 닮아 있습니다.

‘사상의 시장’이라는 비유도 흔히 밀과 함께 이야기되지만, 이 생각이 미국 연방대법원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9년입니다. 올리버 웬들 홈스 대법관은 에이브럼스 사건의 반대의견에서 “진리를 가리는 가장 좋은 시험은 그 생각이 시장의 경쟁 속에서 스스로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힘”이라고 썼습니다(MTSU 수정헌법 제1조 백과). 밀의 논증이 이 비유의 사상적 뿌리라면, 그것을 법의 언어로 옮긴 사람은 홈스였습니다.

국제 규범이 그은 경계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뒤 표현의 자유는 국제 인권 규범이 되었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유엔 총회가 채택한 세계인권선언 제19조는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세계인권선언은 그 자체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선언입니다(유엔).

나이 든 여성이 세계인권선언 영어 전문이 인쇄된 커다란 포스터를 두 손으로 펼쳐 들고 있는 흑백 사진
1949년 11월 미국 뉴욕주 레이크석세스에서 세계인권선언 영어판 포스터를 든 엘리너 루스벨트. 그는 선언문 작성을 이끈 유엔 인권위원회의 위원장이었습니다.
사진: FDR Presidential Library & Museum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구속력 있는 조약은 1966년 12월 16일 채택되어 1976년 3월 23일 발효한 자유권규약입니다. 170개가 넘는 나라가 당사국인 이 조약의 제19조 제3항은, 표현을 제한하려면 법률로 정해야 하고 그 제한이 타인의 권리나 명예를 존중하거나 국가안보·공공질서·공중보건·도덕을 보호하는 데 필요해야 한다고 정합니다. 이어지는 제20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 선전, 그리고 차별·적대·폭력의 선동에 해당하는 민족·인종·종교적 증오의 고취를 법으로 금지하라고 요구합니다(OHCHR; 유엔 조약집). 유럽에서는 이보다 앞서 1950년 11월 4일 로마에서 서명되고 1953년 발효한 유럽인권협약 제10조가 같은 구조를 담았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의무와 책임을 수반”하므로, 법률로 정해지고 민주사회에 필요한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유럽평의회).

어디서 멈추나: 미국과 유럽의 서로 다른 선

그렇다면 자유는 정확히 어디서 멈출까요. 자유권규약 제19조 제3항에서 나온 심사 틀은 세 단계입니다. 제한이 법률에 근거하는가,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인가, 그 목적에 꼭 필요한가. 명예훼손, 폭력 선동, 혐오 표현, 국가 기밀, 사생활 침해는 많은 나라가 공통으로 두는 제한의 범주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정확히 어디에 그어지는지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미국은 선동적인 표현도 원칙적으로 넓게 보호합니다. 1969년 브랜던버그 대 오하이오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큐클럭스클랜(KKK) 집회에서 연설한 지도자를 처벌한 오하이오주 법을 무효로 했습니다. 표현이 ‘임박한 불법 행위’를 선동하거나 일으키려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는 기준이었습니다(코넬대 법률정보연구소). 1919년 솅크 사건에서 홈스 대법관이 내세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보다 훨씬 좁은 선입니다. 반면 자유권규약과 유럽 여러 나라는 증오의 선동을 법으로 금지할 의무를 둡니다. 같은 연설이 한 법제에서는 보호받고 다른 법제에서는 처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멈추나’라는 물음에 인류가 하나의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차이를 나란히 놓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검열은 금지하고, 책임은 남긴다

한국의 헌법은 이 두 전통을 한 조문에 담았습니다. 헌법 제2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진다고 선언하고, 제2항은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 박습니다. 밀턴이 맞섰던 출간 전 허가제를 헌법이 직접 금지한 것입니다. 동시에 제4항은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적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랑스 선언이 말한 ‘남용에 대한 책임’입니다. 여기에 제37조 제2항이 더해집니다. 모든 기본권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 제한할 수 있고, 제한하더라도 그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습니다(국가법령정보센터).

낮은 담장과 정문 너머로 흰 기둥이 늘어선 석조 건물이 서 있고 앞 인도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
서울 종로구 재동의 헌법재판소 본관. 2015년 촬영.
사진: Wei-Te Wong · CC BY-SA 2.0 · Wikimedia Commons

이 조문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 결정에서 분명해졌습니다. 당시 영화법은 모든 영화가 상영 전에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게 하고, 심의를 거치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면 형사처벌까지 할 수 있게 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 일치로 이 사전심의가 헌법 제21조 제2항이 금지한 검열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심의 기관을 정부 부처 대신 민간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로 바꾸었어도, 국가가 법으로 설계한 사전 심사인 이상 검열이라는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헌법재판소 93헌가13 결정). 반면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은 사전검열만을 뜻하므로, 표현이 공개된 뒤에 책임을 묻는 일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헌법재판소 94헌가6 결정). 출간 전에 막는 것은 금지하고, 출간 뒤에 책임을 묻는 것은 허용하는 구조입니다. 1644년 밀턴의 항의와 1789년 프랑스 선언의 단서가 1996년 한국 헌법재판소의 결정 안에서 만난 셈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고대부터 신성불가침으로 이어져 온 완성된 권리가 아닙니다. 아테네의 민회, 인쇄기를 둘러싼 다툼, 혁명기의 선언, 철학자의 논증, 두 차례 전쟁 뒤의 국제 규범, 그리고 각 나라의 헌법과 판례를 거치며 몇 번이고 다시 정의된 개념입니다. 그 사이에는 늘 경계에 대한 물음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답은 달라도, 마음속 생각은 묶지 않되 밖으로 나온 말이 남긴 결과에는 책임을 묻는 골격은 여러 문서에서 되풀이됩니다. 이 긴 역사를 관통하는 믿음이 하나 있다면, 사람은 진리를 구하고 양심을 지키며 서로에게 말을 건네도록 지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지키고 어디서 멈출지는 한 번에 정해지지 않고, 세대마다 다시 묻고 답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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