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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볼: 가뭄과 쟁기가 대평원을 흙먼지로 삼킨 10년

1935년 4월 14일은 유난히 맑은 일요일이었다. 몇 주 동안 대평원을 괴롭히던 흙폭풍이 잠시 멎었고, 사람들은 오랜만에 파란 하늘 아래 빨래를 널고 교회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지평선 북쪽에서 산맥처럼 솟은 검은 벽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새 떼가 앞장서 달아났고, 벽이 마을을 삼키자 한낮이 캄캄한 밤으로 바뀌었다. 훗날 ‘검은 일요일(Black Sunday)’로 불린 이 하루는, 10년에 걸쳐 미국 중부를 뒤덮은 흙먼지 재앙 ‘더스트 볼(Dust Bowl)’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다.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흙먼지 벽.
1935년 텍사스 스트랫퍼드로 밀려오는 거대한 흙폭풍의 벽. 사진: George Everett Marsh Jr.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흙먼지 속을 몸을 숙인 채 걷는 농부와 아이들.
1936년 오클라호마 시마론 카운티에서 흙바람을 맞으며 걷는 농부와 두 아들. 사진: Arthur Rothstein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맑은 하늘을 삼킨 검은 벽

그날의 흙폭풍은 중부 네브래스카에서 발생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미국 기상청(NWS) 노먼 지국의 기록에 따르면 풍속은 시속 약 65~100km(시속 40~60마일)에 이르렀다. 오클라호마 팬핸들 동부에는 오후 4시경, 보이스시티에는 오후 5시 15분경, 애머릴로에는 저녁 7시 20분경 벽이 닿았다.

가장 무서운 것은 빛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애머릴로에서는 약 12분, 텍사스 스트랫퍼드에서는 약 20분 동안 가시거리가 사실상 0으로 떨어졌다. “코앞의 손도 보이지 않았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나왔다. 목격자들은 흙벽이 300미터(1,000피트)가 넘게 솟았다고 표현했지만, 이는 정밀한 계측이 아니라 눈으로 어림한 증언이라 정확한 높이는 알기 어렵다.

먼지 속에서는 강한 정전기가 일었다. 자동차 전기계통이 합선되어 시동이 꺼졌고, 길 한복판에 멈춰 선 차 안에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사람도 많았다(PBS). 이튿날 이 지역을 취재한 AP 통신 기자 로버트 가이거는 기사에서 ‘흙 사발(dust bowl)’이라는 표현을 처음 활자로 옮겼고, 이 말이 곧 재앙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깊은 뿌리를 걷어낸 자리

더스트 볼의 무대는 서경 100도 서쪽의 고평원(High Plains)이었다.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의 팬핸들을 중심으로 뉴멕시코·콜로라도·캔자스에 걸친 이 땅은, 상당 부분 연강수량이 250mm(10인치)에도 못 미치는 반건조 초원이다. 물을 넉넉히 요구하는 밀 농사에는 본래 맞지 않는 곳이었다.

이 마른 땅을 오랫동안 지켜 온 것은 다년생 토종 풀이었다. 겉으로는 볼품없어 보여도, 그 풀들은 땅속 깊이까지 촘촘한 뿌리를 뻗어 표토와 수분을 단단히 붙들었다. 가뭄이 와도 흙이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이 정교한 뿌리 그물은, 반건조 초원이 스스로를 지키도록 설계된 질서였다. 하나님이 이 척박한 땅에 심어 둔 균형은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실은 대평원 생태계 전체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 균형은 한 세대 만에 뒤집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밀 수요가 치솟고 밀값이 오르자, 농부들은 수백만 에이커의 원초원을 갈아엎었다. 텍사스의 라노에스타카도 일대 경작지는 1900년에서 1920년 사이 두 배로, 1925년에서 1930년 사이 다시 세 배로 불어났다. 트랙터와 콤바인이 보급되면서 사람 손으로는 엄두도 못 낼 넓이가 빠르게 밀밭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깊은 뿌리의 다년생 풀이 뽑혀 나간 자리를, 뿌리가 얕은 한해살이 밀이 대신했다는 데 있었다. 밀을 수확하고 맨땅이 드러난 겨울과 휴경기에 가뭄이 찾아오자, 붙들어 줄 뿌리를 잃은 표토가 그대로 바람에 실려 날아올랐다.

바람에 날려 쌓인 흙더미에 반쯤 파묻힌 농기계.
1936년 사우스다코타 댈러스 인근, 날려 온 흙에 파묻힌 농기계와 헛간 자리. 사진: Philip Platt · CC BY-SA 2.0 · 출처 Wikimedia Commons

가뭄과 먼지가 서로를 키웠다

가뭄은 1930년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기록에 남은 첫 흙폭풍은 1930년 9월 14일에 발생했고, 이후 가뭄은 1934년, 1936년, 1939~40년 세 차례 정점을 찍었다. 일부 고평원은 최대 8년 동안 메마른 채였고, 규칙적인 비가 돌아온 것은 1939년 가을에 이르러서였다. 1934년 5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몰아친 폭풍은 시카고에 흙 약 1,200만 파운드(약 5,400톤)를 떨어뜨렸고, 먼지는 동쪽으로 뉴욕과 워싱턴DC 상공까지 날아갔다.

그렇다면 이 재앙은 하늘 탓일까, 사람 탓일까. 과학은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물리과학연구소의 마틴 회얼링 연구팀은, 1930년대 더스트 볼 가뭄이 1950년대 남부평원 가뭄과 달리 바다 수온(SST) 같은 뚜렷한 해양 신호가 아니라 대기 자체의 무작위 변동에서 촉발됐다고 본다. 그래서 이 가뭄은 미리 내다보기가 특히 어려웠다.

여기에 인간의 흔적이 겹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고다드우주연구소의 쿡·밀러·시거 연구팀이 2009년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당시 바다 수온 정보만 넣은 기후 모델은 남서부에 치우친 ‘보통 수준’의 가뭄만 재현할 뿐, 실제로 관측된 대륙 중앙의 건조와 북쪽으로 치우친 피해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람이 초원을 갈아엎어 식생을 없애고 그렇게 일어난 먼지 에어로졸까지 함께 넣어야, 비로소 관측된 더스트 볼의 위치와 강도가 재현됐다. 즉 맨땅에서 피어오른 먼지가 도리어 가뭄을 강화하고 그 중심을 북쪽으로 밀어 올린 ‘되먹임’이 작동한 것이다. 자연이 부른 가뭄 위에 인간이 벗겨 놓은 흙이 겹쳐, 둘이 서로를 키운 셈이다. 다만 이 원인 규명은 아직 완결된 정설이라기보다 지금도 다듬어지는 연구다.

근심 어린 표정의 이주 노동자 어머니와 아이들.
대공황기 캘리포니아의 한 이주 노동자 가족(1936). 사진: Dorothea Lange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흙이 삼킨 살림과 폐

피해는 땅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6년 무렵에는 하루 약 2,500만 달러(당시 화폐 기준)의 손실이 났고, 1940년까지 침식이 심한 카운티의 농지 가치는 28% 떨어졌다. 여러 지역에서는 표토의 75% 이상이 사라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겉흙이 불과 몇 해 만에 바람에 실려 나간 것이다.

사람의 몸도 무너졌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흙먼지를 오래 들이마시면 폐포에 염증이 생기는 ‘먼지 폐렴(dust pneumonia)’이 퍼졌다. 고열과 흉통, 호흡곤란과 마른기침이 이어졌고, 특히 아이와 노인이 취약했다(NEH). 1935년 한 해에만 캔자스에서 수십 명이 먼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 다만 1930년대 대평원에는 공식 사망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재앙 기간 전체의 사망자 수를 하나의 숫자로 못박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남겨진 증언과 기록은 흙먼지가 사람의 폐 속 깊이까지 파고들었음을 또렷이 전한다.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은 짐을 꾸렸다. 1930년부터 1940년까지 대평원 주들에서 빠져나간 인구는 정의에 따라 250만에서 35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8만 6천 명 이상이 한 해 남짓 만에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이들은 흔히 ‘오키(Okie)’라 불렸지만, 실제 이주민 상당수가 가장 심한 피해지 출신은 아니었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대공황기의 일반적인 이농까지 뭉뚱그려 ‘전부 흙폭풍 난민’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존 스타인벡은 소설 『분노의 포도』(1939)에서 조드 가족의 고단한 서부행을 그려, 이 시대의 상처를 오래 기억하게 했다.

다시 흙을 붙드는 법을 배우다

재앙은 역설적으로 땅을 대하는 방식을 근본부터 바꿔 놓았다. 그 중심에는 ‘토양보전의 아버지’라 불리는 휴 해먼드 베넷이 있었다. 그는 1935년 봄 상원 위원회에서 토양보전 법안을 설득하던 중, 마침 중서부에서 날아온 흙먼지가 워싱턴DC 상공을 어둑하게 뒤덮자 창밖을 가리키며 실물로 증언을 대신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NRCS).

그 해 4월 27일 토양보전법(Soil Conservation Act)이 제정되어, 미국 농무부 산하에 토양보전청(Soil Conservation Service, 현 NRCS)이 세워졌고 베넷이 초대 청장을 맡았다. 정부는 등고선을 따라 밭을 갈고 작물을 돌려짓는 법을 보급했으며, 흙을 지키는 농부에게 에이커당 1달러의 보조금을 주었다. 캐나다 국경에서 텍사스 애빌린까지 이어지는 ‘대평원 방풍림’에는 2억 그루가 넘는 나무가 심어져 바람을 갈랐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38년까지 비산하는 토양의 양은 65% 줄었다.

대평원의 회복은 결국, 사람이 걷어냈던 뿌리 깊은 질서를 다시 배우는 과정이었다. 맨땅을 덮어 바람을 막고, 물을 머금는 풀과 나무를 돌려놓는 일. 그것은 처음 이 땅에 심겨 있던 균형을, 청지기의 자리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더스트 볼은 하늘만의 잘못도, 사람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반건조 초원이라는 예민한 땅 위에서 자연의 가뭄과 인간의 무리한 개간이 겹치고, 벗겨진 흙이 다시 가뭄을 키우며 20세기 미국을 상징하는 거대한 재난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잿빛 교훈은, 우리가 발 딛고 선 흙 한 줌에도 오래 지켜 온 정교한 질서가 담겨 있으며 그것을 함부로 걷어낼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지금도 조용히 일러 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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