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을 한 번 치고 나면, 소리는 곧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웅~ 하고 커졌다가 잦아들고, 다시 살아났다가 또 잦아드는 파동이 마치 종이 숨을 쉬는 것처럼 반복됩니다. 1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이 종이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한 소리를 내는 이유는 신비가 아니라 물리입니다. 핵심은 “맥놀이”입니다.

Bernard Gagnon · CC0 · Wikimedia Commons
커졌다 작아지는 소리, 맥놀이란 무엇인가
맥놀이(beat)는 진동수가 아주 가까운 두 음이 겹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두 파동이 보태질 때는 소리가 커지고(보강 간섭), 서로 엇갈릴 때는 소리가 작아집니다(상쇄 간섭). 그 결과 소리의 세기가 규칙적으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합니다.
맥놀이가 얼마나 빠른지는 두 음의 진동수 차이만으로 정해집니다. 두 음이 각각 f₁, f₂ 헤르츠라면 맥놀이 진동수는 그 차이(|f₁ − f₂|)이고, 맥놀이 주기는 그 차이의 역수입니다. 진동수 차이가 작을수록 소리가 천천히 출렁입니다.

도해 · glu.kr 자체 작성
완벽하게 대칭인 종은 맥놀이를 내지 못한다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맥놀이가 생기려면 진동수가 살짝 다른 두 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완전한 회전 대칭(축대칭)을 이룬 종은 맥놀이를 만들 수 없습니다. 완전히 대칭인 종에서는 종을 어느 방향에서 치든 같은 진동 모드가 하나의 진동수만 갖기 때문입니다.
실제 종은 다릅니다. 표면의 문양과 조각, 부위마다 다른 두께, 재질의 밀도 차이, 주조 과정의 미세한 변동 때문에 완벽한 대칭에서 아주 조금씩 어긋납니다. 김석현(강원대)·이치욱·이장무(서울대) 연구팀이 Journal of Sound and Vibration(2005)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종의 이 미세한 비대칭성이 하나의 진동 모드를 진동수가 근소하게 다른 “모드 쌍(mode pair)”으로 갈라놓습니다. 이렇게 갈라진 두 진동수가 서로 간섭하면서 맥놀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를 모드 갈라짐(mode splitting)이라고 부릅니다.

도해 · glu.kr 자체 작성
성덕대왕신종의 두 박자
성덕대왕신종은 1000헤르츠 안쪽에 50여 개의 고유진동수를 가진 것으로 보고됩니다. 그중 소리를 이끄는 두 대역이 있습니다. 낮은 음인 여음(hum) 대역과, 그보다 높은 기본음(fundamental) 대역입니다. 언론과 연구를 통해 알려진 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낮은 음(여음) 약 64헤르츠 대역: 64.07헤르츠와 64.42헤르츠로 갈라져, 그 차이 약 0.35헤르츠가 만드는 맥놀이 주기는 약 2.9초(약 3초)로 전해집니다.
- 높은 음(기본음) 약 168헤르츠 대역: 168.52헤르츠와 168.63헤르츠로 갈라져, 그 차이 약 0.11헤르츠가 만드는 맥놀이 주기는 약 9초(약 9.1초)로 전해집니다.
즉 짧게 출렁이는 약 3초 주기의 여음 위에, 소리가 거의 사라졌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약 9초 주기의 큰 파동이 겹칩니다. 이 두 박자의 겹침이 종이 숨을 쉬는 듯한 인상을 만듭니다. 다만 소수점 단위의 진동수 값은 주로 언론 보도를 통해 유통된 것으로, 원논문의 정밀값과는 소폭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대칭은 의도인가, 결과인가
흥미로운 질문이 남습니다. 이 맥놀이를 만든 비대칭은 장인이 일부러 넣은 것일까요, 아니면 주조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것일까요. 학계와 언론 보도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맥놀이는 종의 미세한 비대칭에서 “비롯된 결과”로 설명되며, 그 비대칭이 오히려 은은하고 다채로운 종소리를 만드는 긍정적 요소로 평가됩니다.
한편으로 성덕대왕신종은 타종 지점(스위트 스팟)의 오차가 0.3%에 불과할 만큼 정밀하다는 발표가 있어, 만든 이들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정밀함이 곧 “맥놀이를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결과 위에 비대칭이 남긴 살아 있는 소리가 얹혔다고 보는 편이 지금까지의 근거에 가깝습니다.
소리를 키우는 한국 종만의 구조
성덕대왕신종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엎어놓은 장독을 닮은 형태입니다. 안에서 금속 추로 치는 서양 종과 달리, 한국 종은 밖에서 당목(撞木)이라는 나무 방망이로 칩니다.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는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앞뒤 두 곳에 배치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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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에는 다른 나라 종에 없는 두 구조가 더 있습니다. 종 꼭대기 용뉴(龍鈕) 옆의 대롱 모양 음통(音筒)과, 종 아래 땅을 파거나 항아리를 묻어 만든 공명 공간인 명동(鳴洞)입니다. 음통은 고주파 잡음을 빠르게 빠져나가게 해 여운을 맑게 한다는 음향필터설이 제안됐지만, 만파식적 상징설이나 주조 시 가스 배출설 등 여러 견해가 병존하며 정설로 굳지 않았습니다. 명동 역시 저주파 공명으로 여운을 키운다고 제안되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 역할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비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음향 구조와 더불어, 종의 몸체에는 공양(供養) 자세의 비천상(飛天像)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모습으로 천의(天衣)와 보상화가 구름처럼 흩날리는데, 다른 신라 동종에서 보기 어려운 뛰어난 조각이어서 한국 비천상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Josep Panadero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에밀레 전설과 종이 스스로 남긴 기록
성덕대왕신종은 흔히 “에밀레종”으로 불립니다. 종을 완성하려고 어린아이를 시주받아 쇳물에 넣었고, 그래서 종소리가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에밀레” 소리처럼 들린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인신공양 이야기는 종 자신이 남긴 기록과 어긋납니다.

Josep Panadero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이 종의 몸체에는 약 1000여 자(총 약 1037자, 서문 약 630자와 명 약 200자로 전함)의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림랑 김필오가 지은 이 글에는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경덕왕이 발원해 혜공왕 대인 771년에 종을 완성한 제작 경위가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넣었다는 인신공양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구나 인신공양 설화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당대·고려의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문헌으로 확인되는 첫 등장은 1925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렴근수(염근수)의 동화 《어밀네 종》으로, 통일신라 당대가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서야 활자화된 후대의 민담입니다. 과학적 뒷받침도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의뢰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이 1998년 종의 12곳에서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뼈의 주성분인 인(P)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닫는 말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걸렸다가 절이 사라진 뒤 영묘사(靈廟寺)로, 다시 경주읍성 봉황대(鳳凰臺) 아래 종각으로 옮겨졌고, 1915년에는 여러 사람의 손에 이끌려 경주의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 가며 1200여 년을 건너온 종이 지금도 같은 원리로 웁니다.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성덕대왕신종은 771년에 완성된, 현존하는 신라의 종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정밀 실측한 무게는 약 18.9톤입니다. 이 거대한 청동 덩어리가 지금도 숨 쉬듯 노래하는 이유는 초자연적 사연이 아니라, 완벽한 대칭에서 아주 조금 벗어난 형태가 만들어낸 맥놀이입니다. 인간의 정교한 솜씨와 그 위에 남은 미세한 어긋남이 함께 빚어낸, 물리로 설명되는 아름다움인 셈입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성덕대왕신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범종(梵鐘)
- 위키백과 — 성덕대왕신종
- 위키백과 — 맥놀이
- Kim, Lee & Lee, “Beat characteristics and beat maps of the King Seong-deok Divine Bell”, JSV 281 (2005)
- NASA ADS — 위 논문 서지정보
- 경향신문 — 성덕대왕신종 맥놀이와 스위트 스팟
- 경향신문 — 에밀레, 1000년을 넘어 마음을 울리는 소리엔 비밀이 있다(도재기의 천년향기)
- 국가유산 지식이음 — 성덕대왕신종 명문(금석문 DB)
- 우리역사넷 — 성덕대왕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