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월 20일, 베를린 남서쪽 반제 호숫가의 한 저택에 나치 독일 고위 관료 열다섯 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점심을 곁들인 회의에서 유럽 유대인 약 1,100만 명을 어떻게 ‘처리’할지 부처 간 역할을 나눴습니다. 흔히 이 반제회의에서 홀로코스트가 ‘시작’됐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날 이미 수십만 명이 총구 앞에서 목숨을 잃은 뒤였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한 사람의 광기나 한 번의 결정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법과 관료제와 수많은 협력자가 쌓아 올린 국가 주도의 범죄였습니다.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이 조직적으로 살해한 유럽 유대인은 약 600만 명에 이릅니다.


혈통으로 사람을 가른 법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이 왜 유대인을 겨눴는지를 봐야 합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종교적 편견을 넘어선 ‘인종’ 이론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을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열등하고 위험한 인종’으로 규정했습니다. 개종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혈통의 낙인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종교적 박해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USHMM).
1933년 1월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뒤, 박해는 곧바로 법의 옷을 입었습니다. 1935년 9월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이 대표적입니다. 제국시민법은 유대인에게서 독일 시민권을 빼앗아 열등한 ‘신민’으로 격하했고,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는 법’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혼과 성관계를 금지했습니다. 누구를 ‘유대인’으로 볼지는 신앙이 아니라 조부모의 혈통으로 정해졌습니다. 조부모 넷 가운데 셋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분류됐습니다(USHMM).
폭력은 곧 거리로 번졌습니다. 1938년 11월 9일에서 10일에 이르는 밤, 독일 전역에서 조직된 포그롬이 벌어졌습니다. ‘깨진 유리의 밤(크리스탈나흐트)’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나치는 1,400곳이 넘는 시나고그를 불태우고 유대인 상점 수천 곳을 부쉈으며, 약 2만 6천 명의 유대인 남성을 강제수용소에 가뒀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민중의 분노’로 위장한 신호탄이었습니다(USHMM).
총구가 먼저였다: 게토와 이동학살부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박해는 학살로 넘어갔습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나치는 바르샤바와 우치 같은 도시의 유대인을 좁고 봉쇄된 구역, 곧 게토에 몰아넣었습니다. 게토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굶주림과 질병 속에 사람을 가둔 뒤 이송과 학살로 넘기는 대기소였습니다.
결정적 전환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왔습니다. 침공군 뒤를 따라간 ‘아인자츠그루펜(이동학살부대)’은 동유럽 곳곳에서 유대인을 마을 밖으로 끌어내 구덩이 앞에 세우고 총으로 쏘았습니다. 이 총살로만 목숨을 잃은 유대인이 약 200만 명에 이릅니다. 절멸의 첫 국면은 가스실이 아니라 총구 앞의 들판에서 벌어진 셈입니다(USHMM).
이런 학살이 이미 대규모로 진행되던 1942년 1월, 반제회의가 열렸습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이 회의는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겨눈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을 부처 사이에서 조율하고 확대하려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강조하면, 반제회의는 학살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던 학살을 유럽 전체로 체계화한 행정 회의였습니다. 많은 집단이 희생됐지만, 나치가 유럽 전역에서 남김없이 절멸하려 한 대상은 유대인이었습니다(USHMM).

죽음이 공장이 되다: 절멸수용소
최종해결책이 조율되면서, 나치는 살인을 하나의 ‘공정’으로 만들었습니다. 흔히 뭉뚱그려 부르지만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는 성격이 다릅니다. 강제수용소가 강제노동과 구금을 위한 시설이라면, 절멸수용소는 오직 대량 살해를 위해 설계된 곳이었습니다.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그리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 점령 폴란드에 세워진 이 다섯 곳에서 약 270만 명의 유대인이 주로 독가스로 살해됐습니다(USHMM).
그중에서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됐습니다. 이곳에서 약 11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90퍼센트 이상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바로잡을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이 죽었다’는 수치가 떠돌았지만, 이는 옛 소련 시절 명판의 과장으로, 오늘날 박물관과 학계가 확인한 정본은 약 110만 명입니다(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수감자 수천 명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치는 다가오는 패전 앞에서 수감자들을 서쪽으로 내모는 ‘죽음의 행진’을 강행하고, 증거를 없애려 가스실과 소각장을 폭파한 뒤였습니다(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숫자 뒤에 있던 사람들
홀로코스트를 말할 때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숫자입니다. 정확한 인원은 끝내 확정할 수 없지만, 연구들은 살해된 유대인을 약 600만 명으로 봅니다. 전쟁 전 유럽에 살던 유대인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사라진 규모입니다(USHMM).
유대인만 희생된 것은 아닙니다. 나치와 그 협력자들은 약 330만 명의 소련군 포로와 약 180만 명의 폴란드 민간인을 죽였고, 25만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로마니(집시), 이른바 ‘안락사’ 계획으로 25만에서 30만 명의 장애인,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 신자 약 1,700명을 비롯한 여러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했습니다(USHMM). 이 숫자들은 통계가 아니라, 저마다 이름과 얼굴과 이야기를 지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맞선 사람들
절망 속에서도 저항은 있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19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이어진 바르샤바 게토 봉기입니다. 나치가 남은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려 하자, 유대전투조직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이 무기를 들었습니다. 스물세 살의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가 이끈 수백 명의 전사는 중무장한 독일군에 맞서 거의 한 달을 버텼습니다. 무기도 승산도 없는 싸움이었지만, 이는 나치 점령하 유럽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도시 봉기였습니다(USHMM).
저항은 총을 든 싸움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게토 안으로 식량을 밀반입하고, 훗날 진실을 증언할 문서와 기록을 몰래 묻어 보관했으며, 아이들을 담장 너머로 빼돌려 숨겼습니다. 같은 1943년에는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일부가 탈출했습니다. 죽음의 한복판에서 존엄을 지키려 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심판, 그리고 기억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무너진 뒤, 세계는 이 범죄를 어떻게 심판할지 물었습니다.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국제군사재판이 열렸습니다. 미국·영국·소련·프랑스가 함께 세운 이 법정은 주요 전범 스물두 명을 재판했고, 그 가운데 열두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1946년 10월,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반인도 범죄를 국제 법정이 심판한 이 재판은 이후 국제법의 이정표가 됐습니다(USHMM).
오늘날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로 지켜집니다. 예루살렘의 야드바셈, 워싱턴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비롯한 세계의 연구·기억 기관들은 방대한 문서와 증언, 물증으로 이 사건을 기록해 왔습니다. 그만큼 확고한 증거 앞에서 ‘가스실은 없었다’거나 희생자 수를 축소하려는 홀로코스트 부인은 역사적 견해가 아니라 명백한 왜곡입니다.
홀로코스트가 우리에게 남긴 물음은 결국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평범한 법과 관료와 이웃이, 저마다 존엄하게 지음받은 사람들을 겨눈 대량 학살에 어떻게 가담하게 되는가. 기억한다는 것은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는 안 된다’는 다짐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