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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가 한약재가 된 길 — 산수유자의 문헌 역사와 성분(로가닌·모로니사이드)

이른 봄, 아직 잔설이 남은 산자락에서 잎도 나기 전에 노란 꽃이 먼저 터집니다. 전남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 골짜기가 그렇습니다. 매화보다도 이르게 헐벗은 가지 끝을 노랗게 물들이는 이 꽃나무를 우리는 산수유(山茱萸)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영어 이름은 뜻밖에도 ‘일본 산수유(Japanese cornel)’입니다. 이름은 일본을 가리키지만, 정작 이 나무의 붉은 열매는 이천 년 넘게 동아시아 전역에서 귀한 약재로 쓰여 왔습니다. 게다가 약으로 쓰려면 잘 익은 열매의 씨를 일일이 발라내야 하는, 뜻밖의 손품이 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봄의 첫 노란빛에서 시작해 한약재가 되기까지, 산수유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잎이 나기 전 노란 꽃이 무리 지어 핀 산수유 가지.
이른 봄, 잎보다 먼저 노랗게 피어난 산수유 꽃. 사진: National Institute of Ecology · KOGL Type 1 · 출처 Wikimedia Commons
가지에 매달린 길둥근 붉은 산수유 열매.
가을에 붉게 익은 산수유 열매. 씨를 발라낸 과육이 약재가 된다. 사진: National Institute of Ecology · KOGL Type 1 ·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른 봄을 여는 노란 꽃

산수유는 층층나무과(Cornaceae)에 속하는 낙엽 관목 또는 작은 교목입니다. 학명은 Cornus officinalis Siebold & Zucc.로, 19세기 일본에서 채집한 표본을 바탕으로 정식 기재되었습니다(POWO, IPNI). 다 자라면 높이와 폭이 약 8미터에 이르고, 거친 껍질이 얇게 벗겨지는 독특한 수피를 가집니다. 잎은 마주나며 난형에서 타원형이고, 가을이면 붉게 물듭니다.

이 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개화 시기입니다. 대개 이른 봄, 잎이 돋기도 전에 자잘한 노란 꽃들이 우산살처럼 펼쳐진 산형(umbel) 꽃차례로 무리 지어 핍니다(Wikipedia). 봄기운이 채 퍼지기 전, 헐벗은 가지에서 터지는 노란빛은 생강나무·매화와 함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신호로 꼽힙니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 그 자리에 길둥근 붉은 핵과가 익습니다. 종소명 officinalis는 ‘약재로 쓰인다’는 뜻이며, 실제로 이 붉은 열매는 신맛이 강하지만 먹을 수도 있습니다.

봄에 가장 먼저 꽃을 여는 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보니, 산수유는 이른 봄 꿀벌 같은 곤충들에게 귀한 밀원이 되기도 합니다.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해지면 여름 내내 짙은 초록으로 서 있다가, 가을이 깊어지면 잎은 붉게 물들고 열매도 함께 익어 붉은 점을 가지마다 수놓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셈입니다.

이름은 ‘일본’, 뿌리는 동아시아

영어 이름은 Japanese cornel 또는 Japanese cornelian cherry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산수유는 일본만의 나무가 아니라 중국·한국·일본에 두루 자생합니다(NCSU Extension). 특히 중국의 저장성·허난성 일대가 주 산지로 꼽힙니다. 한국에서는 sansuyu, 중국에서는 shanzhuyu로 부르는 이 나무는 지역마다 오래도록 함께해 온 셈입니다.

혼동하기 쉬운 다른 종도 있습니다. 유럽과 서남아시아에 자생하는 Cornus mas(코넬리안 체리)는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으로, 유럽 전통의학에서 수렴·강장 목적으로 쓰였습니다(비교 연구, PMC). 반면 동아시아의 Cornus officinalis는 한방에서 ‘산수유자’라는 약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두 나무 모두 이름에 ‘체리’가 붙지만, 벚나무가 속한 Prunus속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열매가 붉고 신맛이 난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산수유’로 팔리는 약재를 고를 때에도, 유럽산 코넬리안 체리와는 성분과 쓰임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 두면 도움이 됩니다.

껍질이 조각조각 벗겨진 산수유 나무 줄기.
얇게 벗겨지는 독특한 수피를 가진 산수유 줄기. 사진: National Institute of Ecology · KOGL Type 1 · 출처 Wikimedia Commons

신농본초경에서 동의보감까지

산수유가 약재로 걸어온 길은 문헌이 증언합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본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이미 산수유 열매가 올라 있습니다. 신농본초경은 후한(25~220년) 무렵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365종의 약물을 상·중·하 삼품(三品)으로 나눈 책입니다(본초 개설 문헌). 한 종합 리뷰는 산수유 열매가 약 이천이백 년 전 이 책에 처음 기재되었다고 전하며,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오래 쓰여 온 약재로 알려져 있습니다(Chinese Medicine 리뷰). 삼품 분류는 약을 독성과 쓰임에 따라 상·중·하로 나눈 옛 체계입니다. 산수유가 이처럼 이른 시기부터 정식 약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그 쓰임이 우연한 민간요법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경험 위에 정리된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한국의 기록도 뚜렷합니다.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1433)과 허준이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년 완성, 1613년 간행)에 산수유가 실려 있습니다. 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의서로, 산수유를 간과 신에 작용해 정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갈무리하는 수렴·강장 약재로 설명합니다. 다만 이런 서술은 어디까지나 전통 한의학의 용법으로 이해해야 하며, 현대 의학이 임상으로 입증한 치료 효과와는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처럼 중국의 본초 전통과 한국의 의서가 나란히 산수유를 기록해 왔다는 점은, 이 열매가 특정 지역만의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의학이 함께 공유한 자산이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씨를 발라내고 과육만 남기다

한약재로서의 산수유에는 흥미로운 손질 과정이 숨어 있습니다. 약으로 쓰는 부위는 씨가 아니라 과육입니다. 잘 익은 붉은 열매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뒤 가운데 단단한 씨(核)를 빼내고, 남은 과육만 말려서 약재로 씁니다. 이 과정을 거핵(去核)이라 부릅니다(한국한의학연구원).

이 한 단계에는 옛사람들의 경험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씨에는 과육과 성질이 다른 성분이 들어 있어, 전통적으로 씨를 반드시 제거해야 제대로 된 약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흔히 ‘산수유’라고 하면 나무 전체나 붉은 열매를 떠올리지만, 약재로서의 ‘산수유자’는 정확히는 씨를 발라낸 마른 과육을 가리킵니다. 신맛을 내는 이 과육이 바로 다음에 살펴볼 약효 성분의 저장고입니다.

신맛도 우연이 아닙니다. 한의학에서 신맛은 흩어지는 기운을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수렴의 성질과 연결되며, 이는 산수유가 ‘정기가 새지 않도록 갈무리한다’고 본 전통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옛 의학의 언어로 정리된 것이어서, 뒤에서 볼 성분 차원의 이야기와는 층위가 다르다는 점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노란 산수유 꽃이 가득 핀 구례 산동의 봄 풍경.
봄이면 온 골짜기가 노랗게 물드는 전남 구례 산동의 산수유 군락. 사진: Korea.net /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 CC BY-SA 2.0 · 출처 Wikimedia Commons

로가닌과 모로니사이드, 열매 속 화학

산수유 열매에서는 지금까지 약 90종의 화합물이 분리·동정되었습니다(Chinese Medicine 리뷰). 그 가운데 이리도이드(iridoids)·탄닌(tannins)·플라보노이드(flavonoids)가 3대 주성분군으로 꼽힙니다. 그 밖에 우르솔산·올레아놀산 같은 트리테르페노이드, 갈로탄닌과 엘라기탄닌, 유기산, 다당류, 안토시아닌 등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리도이드는 여러 식물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성분군으로, 흔히 쓴맛이나 독특한 향과 관련됩니다.

이 가운데 산수유 열매를 대표하는 성분은 이리도이드 배당체인 로가닌(loganin)과 모로니사이드(morroniside)입니다. 두 물질은 열매에서 가장 함량이 높은 이리도이드 배당체로, 코르누사이드·스웨로사이드·로가닌산 등이 그 뒤를 잇습니다. 로가닌과 모로니사이드는 분자량이 각각 390과 406 안팎으로 구조가 서로 닮았지만, 산수유자 안에서 지니는 위상은 조금씩 다릅니다. 특히 모로니사이드가 흥미롭습니다. 유럽의 Cornus mas와 동아시아의 Cornus officinalis는 로가닌·스웨로사이드 같은 성분을 공유하지만, 모로니사이드는 Cornus officinalis 열매를 뚜렷이 특징짓는 성분으로 두드러집니다(비교 연구, PMC). 그래서 중국약전은 모로니사이드와 로가닌을 산수유자의 품질을 판정하는 지표 성분으로 규정하고, 고성능 액체크로마토그래피(HPLC)로 그 함량을 측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Frontiers 리뷰).

하나님이 이 작은 붉은 열매 속에 빚어 놓으신 화학은 놀랍도록 정교합니다. 다만 항산화·항염 같은 활성은 대부분 실험실과 동물 연구에서 보고된 단계이며, 사람에게서 입증된 치료 효과로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전통적 용법과 아직 연구 단계에 있는 가능성을 나누어 읽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구례 산동의 천년 나무와 전설

한국에서 산수유를 말할 때 전남 구례군 산동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일대는 국내 최대 산수유 산지 가운데 하나로, 봄이면 온 골짜기가 노랗게 물듭니다. 산동면 계척마을에는 수령이 약 1000년으로 전해지는 시목(始木)이 있습니다. 높이 약 7미터, 둘레 약 4.8미터에 이르는 이 노거수는 마을의 상징입니다. 2020년에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이 나무의 종자를 시드볼트에 영구 저장하기도 했습니다. 봄이면 이 골짜기에서 산수유 축제가 열리고, 가을이면 붉게 익은 열매를 거두어 씨를 발라내는 손길로 마을이 분주해집니다. 관광 안내에서는 이 지역이 전국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점유율은 자료마다 달라 ‘국내 최대 산지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계척마을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합니다. 약 1000년 전 중국 산둥 지방에서 시집온 처녀가 산수유를 가져와 처음 심었다는 유래담입니다. 다만 이는 확립된 사실이라기보다 마을에 전해 오는 전설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국내 최초의 산수유나무’라는 단정 역시 근거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골짜기 사람들이 오랜 세월 산수유를 가꾸고 씨를 발라 약재로 갈무리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름은 ‘일본 산수유’이지만 그 뿌리는 동아시아 깊은 곳에 닿아 있고, 화려하지 않은 관목 한 그루가 이른 봄의 첫 노란빛부터 가을의 붉은 열매까지, 그리고 씨를 발라낸 과육 속 정교한 화학까지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작은 나무 한 그루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한 식물에 새겨진 자연과 사람의 오랜 이야기를 함께 읽는 일이기도 합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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