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과일 가게에 복숭아와 천도복숭아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뽀얀 솜털로 덮여 손끝에 보드랍고, 다른 하나는 사과처럼 매끈합니다. 천도복숭아를 ‘복숭아와 자두를 교배한 과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둘은 같은 종이고 눈에 띄는 차이는 껍질의 솜털입니다. [3] 그렇다면 복숭아의 솜털은 언제, 어디서 생길까요? 답은 뜻밖에도 열매가 아니라 꽃 속에 있습니다. 꽃이 피기 4주쯤 전, 꽃봉오리 안쪽 씨방 표면에서 솜털이 먼저 돋기 시작합니다. [4]
이 글에서는 잎보다 먼저 피는 복숭아꽃의 구조를 살펴보고, 그 꽃 한가운데 숨은 털 난 씨방이 어떻게 솜털 덮인 열매가 되는지, 그리고 천도복숭아에서는 무엇이 그 솜털을 지웠는지를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이름부터 오해받은 나무, 복숭아
복숭아의 학명은 프루누스 페르시카(Prunus persica)로, 장미과 벚나무속에 속합니다. 종소명 ‘페르시카’는 ‘페르시아의’라는 뜻이지만 원산지가 페르시아라는 뜻은 아닙니다. 복숭아는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서 널리 재배되다 유럽으로 건너갔고, 18~19세기 유럽 식물학자들은 복숭아가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로마 시대의 기록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3] 실제 기원은 중국으로 봅니다. [1] 『중국식물지(Flora of China)』는 복숭아를 중국 북부 원산으로 적으면서, 진짜 야생 복숭아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2]
재배의 역사도 깁니다. 2014년에 발표된 연구 이후로는 중국 저장성에서 이르면 기원전 6000년 무렵 복숭아가 순화되었다고 보며, 항저우 인근 콰후차오(跨湖橋) 유적의 복숭아씨를 가장 오래된 고고학 증거로 꼽습니다. [3]
나무는 잎이 지는 작은 키나무입니다. 6.5미터에 이르는 일은 드물고, 과수원에서는 가지치기로 3~4미터 안팎에 맞춥니다. 잎은 광택이 도는 피침형이며, 잎 밑부분에 흔히 꿀샘이 있어 단물을 내어 개미 같은 곤충을 부릅니다. [1]
잎보다 먼저 피는 꽃, 다섯 장의 설계
복숭아꽃은 대개 잎이 돋기 전에 핍니다. 꽃은 보통 한 자리에 하나씩 달리고, 지름은 2~3.5센티미터입니다. [2] 열매를 얻으려고 기르는 품종은 분홍이나 붉은 꽃이 흔하고, 관상용으로 기르는 나무 가운데에는 겹꽃도 있습니다. [3] 벚꽃·매화·살구꽃과 복숭아꽃을 구별하는 방법은 벚꽃과 비슷한 꽃을 구별하는 글에서 따로 다룹니다.
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면 질서가 보입니다. 꽃잎 다섯 장과 꽃받침 다섯 장, 그리고 세 겹으로 둘러선 수술이 짧은 통 모양의 받침인 화탁통(hypanthium) 가장자리에 붙어 있습니다. [1] 수술은 20~30개이고 꽃밥은 자줏빛이 도는 붉은색입니다. 화탁통 한가운데에는 암술 하나가 서 있고, 그 밑동의 씨방 안에는 장차 씨가 될 밑씨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2]
복숭아꽃은 자기 꽃가루로도 수정되는 성질이 있어, 다른 나무의 꽃가루를 받는 비율은 약 5퍼센트에 그칩니다. [3] 수정이 끝나면 꽃잎이 지고 씨방이 부풀어 열매가 됩니다. 단단한 핵이 씨를 감싸고, 그 바깥을 과육이 둘러싼 핵과(drupe)입니다. [1]

솜털은 꽃 속 씨방에서 먼저 자랍니다
복숭아꽃을 세로로 갈라 보면 뜻밖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화탁통 바닥에 자리 잡은 연둣빛 씨방이 가는 흰 털로 덮여 있습니다. 『중국식물지』도 복숭아의 씨방에 털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2] 이 씨방이 수정 뒤에 자라서 열매가 되므로, 씨방의 털이 곧 복숭아 껍질 솜털의 시작입니다.

솜털이 돋는 때는 생각보다 이릅니다. 털 있는 복숭아 품종 ‘컨텐더(Contender)’를 관찰한 기록에 따르면, 열매 껍질의 털은 꽃이 피기 4주쯤 전에 이미 씨방 위에 나타납니다. 털을 만드는 유전자 PpeMYB25는 그보다 조금 이른 개화 5주 전부터 꽃봉오리에서 켜져, 개화 1주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4] 꽃잎이 열리기도 전에, 봉오리 속에서 열매의 겉옷이 먼저 지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털은 열매와 함께 자라지만, 열매가 다 익을 무렵이면 껍질의 털 대부분은 이미 죽은 세포입니다. [4] 털 하나하나는 얇은 큐티클 층에 싸여 있고, 속은 다당류 물질로 차 있습니다. [5]

껍질을 덮은 솜털의 정체, 트리콤
복숭아 솜털은 식물학에서 트리콤(trichome), 우리말로 모용이라 부르는 표피 돌기입니다. 복숭아 열매의 트리콤은 분비 기능이 없는 비선모이고 세포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쪽 빈 공간은 좁고 세포벽은 두껍습니다. 실험식물 애기장대의 잎 털이나 목화 섬유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6]

이 털은 무슨 일을 할까요? 과일 트리콤을 정리한 리뷰 논문은 복숭아의 트리콤을 병 방어, 수분 증산 조절, 자외선 차단 같은 여러 기능을 하는 물리적 장벽으로 봅니다. [6]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스페인 연구진이 복숭아 껍질을 분석해 보니, 털을 깎아 내거나 표면 왁스를 녹여 낸 열매는 더 빨리 물기를 잃었습니다. 털 층과 그 아래 큐티클은 물과 어울리는 성질이 서로 달라, 껍질 표면이 성질이 다른 두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5]
그런데 가게에 나오는 복숭아는 수확 직후 솔질로 솜털을 상당 부분 털어 낸 경우가 많습니다. 열매를 지켜 주던 털을 굳이 없애는 이유로 연구자들은 알레르기와 곰팡이를 꼽습니다. [6] 한 연구에서는 복숭아의 트리콤을 제거했더니 모닐리니아(Monilinia) 곰팡이가 일으키는 수확 후 갈색썩음병이 눈에 띄게 줄고, 열매 표면 세균의 다양성도 낮아졌습니다. [7] 나무에 달린 동안에는 열매를 지키는 장벽이던 털이, 수확한 뒤에는 미생물이 머무는 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도복숭아의 반전, 유전자 하나의 차이
천도복숭아(넥타린)는 복숭아와 자두의 교배종이 아닙니다. 복숭아와 같은 종(Prunus persica)이며, 시장에서는 다른 과일처럼 다루지만 차이는 껍질의 털, 곧 트리콤이 없다는 점입니다. 1906년의 교배 실험에서 이미 털 없는 형질이 열성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1917년 미국 식물학자 율리시스 헤드릭은 둘의 차이가 종이나 변종의 차이가 아니라 단순한 돌연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
그 돌연변이의 정체는 2014년에 밝혀졌습니다. 이탈리아 연구진은 털 있는 ‘컨텐더’와 털 없는 천도복숭아 ‘암브라(Ambra)’를 교배해 얻은 2세대 305그루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털의 유무를 정하는 G 좌위를 5번 염색체의 약 1.1센티모건, 유전체상 63만 5천 염기쌍 구간으로 좁혔습니다. 그 안에서 찾아낸 후보가 식물의 털 형성을 조절하는 R2R3-MYB 계열 전사인자 유전자 PpeMYB25입니다. [4]
천도복숭아에서는 이 유전자의 세 번째 엑손에 Ty1-copia 계열의 이른바 ‘뛰는 유전자’(LTR 레트로트랜스포존)가 끼어들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고 곧바로 종결 신호가 생겨, 단백질이 112개 아미노산 길이에서 잘립니다. 실제로 컨텐더의 꽃봉오리에서는 개화 5주 전부터 이 유전자가 켜졌지만, 암브라의 꽃봉오리에서는 발현이 한 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 털이 시작되는 바로 그 꽃봉오리에서, 털을 만들라는 신호가 꺼져 있는 것입니다.
연구진이 현대 천도복숭아 품종의 주요 조상과 이탈리아 남부의 재래종까지 살펴보니 모두 같은 삽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천도복숭아의 매끈한 껍질은 단 한 번의 돌연변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4] 드문 예외도 있습니다. 2025년 대만 연구진이 복숭아 295계통을 조사했더니 294계통은 이 유전자형과 털의 유무가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복숭아에서 갈라져 나온 ‘마라빌랴 넥타린 돌연변이’ 하나는 유전자 서열이 멀쩡한데도 털이 없었고, 이 품종에서는 PpMYB25 전사체가 아예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8] 서열이 고장 났든 스위치가 꺼졌든, 털의 유무는 결국 이 유전자가 일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영어 낱말 ‘넥타린’이 인쇄물에 처음 나온 것은 1611년이지만, 복숭아의 원산지인 아시아 중부와 동부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길렀을 것으로 봅니다. [3] 2013년 기준으로 이탈리아 복숭아 생산의 30퍼센트, 미국의 20퍼센트가 천도복숭아였습니다. [4]

솜털과 알레르기, 껍질에 몰린 단백질
복숭아를 먹거나 만질 때 입 안이 가렵거나 목이 따끔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Pru p 3라는 약 9킬로달톤 크기의 비특이 지질전달단백질(nsLTP)입니다. 스페인의 한 전향 연구에서는 복숭아 알레르기 환자 302명 가운데 83.4퍼센트가 Pru p 3에 감작되어 있었습니다. [9]
이 단백질은 과육보다 껍질에 몰려 있습니다. 노란 복숭아와 붉은 복숭아를 분석한 연구에서 껍질 추출물의 지질전달단백질 함량은 과육의 약 7배였습니다. [10] 솜털에도 많습니다. 이탈리아 연구진은 복숭아 털 추출물에 이 단백질이 다량 들어 있고, 환자 혈청이 껍질보다 털에 더 강하게 반응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들은 유통 전 솔질과 세척으로 털이 빠지는 정도의 차이가 지중해 지역과 북유럽의 알레르기 빈도 차이를 설명할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내놓았습니다. [11] 다 익은 복숭아에서 Pru p 3이 트리콤 안에 자리한다는 관찰도 있습니다. [6] 이 단백질은 열과 소화 효소에 잘 견디는 구조여서 익혀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9]
그렇다고 ‘복숭아 털은 사람을 괴롭히려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해석입니다. 털은 열매의 물기와 표면을 지키는 구조이고, 알레르기 단백질이 껍질과 털에 많다는 것은 그와 별개로 관찰된 사실입니다. 알레르기가 있다면 껍질을 벗기거나 씻는 것만으로 안전하다고 단정하지 말고 전문의와 상의하는 편이 좋습니다.
복숭아 한 알의 솜털은 여름 과일 가게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잎보다 먼저 피는 다섯 장 꽃잎의 한가운데, 꽃이 피기 한 달쯤 전 봉오리 속 씨방에서 이미 돋기 시작했습니다. 그 털을 만들라는 신호는 PpeMYB25라는 유전자 하나에서 나오고, 그 유전자에 ‘뛰는 유전자’ 하나가 끼어든 나무에서는 매끈한 천도복숭아가 열립니다. 꽃과 열매, 겉모습과 유전자가 이렇게 한 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더 촘촘하게 짜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고 자료
- Encyclopaedia Britannica: Peach — 중국 기원, 나무 높이, 잎 밑의 꿀샘, 꽃잎·꽃받침·세 겹의 수술과 화탁통, 핵과.
- Flora of China: Amygdalus persica — 잎보다 먼저 피는 꽃, 지름 2~3.5cm, 수술 20~30개, 털 있는 씨방, 중국 북부 원산. 복숭아속 기재: 씨방의 밑씨 2개.
- Wikipedia: Peach — 학명의 유래, 순화 시기와 콰후차오 유적, 자가결실과 타가수분 약 5%, 천도복숭아의 역사(1611년, 1906·1917년).
- Vendramin et al. (2014): A Unique Mutation in a MYB Gene Cosegregates with the Nectarine Phenotype in Peach. PLoS ONE — 개화 4주 전 씨방의 털, PpeMYB25 발현 시기, G 좌위 1.1cM(635kb), 엑손 3의 Ty1-copia 삽입과 112개 아미노산 절단, 단일 돌연변이 기원, 생산 비중.
- Fernández et al. (2011): New Insights into the Properties of Pubescent Surfaces: Peach Fruit as a Model. Plant Physiology — 트리콤의 구성, 털 제거·왁스 제거 뒤 탈수 증가, 털 층과 큐티클의 성질 차이.
- Fu et al. (2025): The role, regulation and application of plant fruit trichomes. Molecular Horticulture — 복숭아 트리콤의 구조와 기능, 수확 직후 솔질, Pru p 3의 트리콤 내 위치.
- Shen et al. (2023): Effect of peach trichome removal on post-harvest brown rot and on the fruit surface microbiome. International Journal of Food Microbiology — 트리콤 제거 뒤 갈색썩음병 감소와 표면 미생물 변화.
- Huang et al. (2025): Transcriptomic analysis of peaches and nectarines reveals alternative mechanism for trichome formation. BMC Plant Biology — 295계통 조사, 마라빌랴 넥타린 돌연변이의 예외.
- Thermo Fisher Allergen Encyclopedia: Pru p 3 (f420) — 9kDa nsLTP, 스페인 환자 302명 중 83.4% 감작, 열·소화 효소 저항성.
- Carnés et al. (2002): Pru p 3 (LTP) content in peach extracts. Allergy — 껍질의 지질전달단백질 함량이 과육의 약 7배.
- Asero et al. (2006): Peach fuzz contains large amounts of lipid transfer protein. European Annals of Allergy and Clinical Immunology — 털 추출물의 LTP와 유통 전 처리에 관한 가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