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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과 복숭아 털의 비밀: 다섯 장 꽃잎과 솜털에 숨은 설계

여름 과일 가게 좌판에 복숭아와 천도복숭아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뽀얀 솜털로 덮여 손에 닿으면 보드랍고, 다른 하나는 사과처럼 매끈하고 반들거립니다. 많은 사람이 천도복숭아를 ‘복숭아와 자두를 교배한 별종’이라 알고 있지만, 사실 둘은 같은 종입니다. 두 과일을 가른 것은 유전자 딱 하나이고, 그 유전자가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복숭아 껍질의 솜털입니다. 이 작은 털 한 겹과,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다섯 장 꽃잎 속에는 생각보다 정교한 설계가 담겨 있습니다.

분홍빛 복숭아꽃 한 송이의 클로즈업, 다섯 장 꽃잎과 수술이 보인다
잎보다 먼저 이른 봄에 피는 복숭아꽃. 꽃잎 다섯 장과 여러 개의 수술이 짧은 화탁통 가장자리에 붙어 있습니다. 사진: 松岡明芳 · CC BY-SA 3.0 · 출처 Wikimedia Commons
나뭇가지에 달린 솜털 덮인 잘 익은 복숭아
껍질을 덮은 뽀얀 솜털이 뚜렷한 잘 익은 복숭아. 이 솜털이 바로 단세포 트리콤입니다. 사진: SriMesh · CC BY-SA 3.0 ·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름부터 오해받은 나무, 복숭아

복숭아의 학명은 프루누스 페르시카(Prunus persica (L.) Batsch)로, 장미과에 속합니다. 종소명 ‘페르시카’는 ‘페르시아의’라는 뜻이지만, 복숭아의 원산지가 페르시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원산지는 중국 서북부이며, 복숭아가 실크로드를 따라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해졌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이 과일을 페르시아의 것으로 오해해 붙인 이름입니다 (Britannica).

복숭아 재배의 역사는 놀랄 만큼 깁니다. 영문 위키백과는 중국 저장성 일대에서 이르면 기원전 6000년 무렵부터 복숭아가 순화되었다고 서술하며, 항저우 인근 콰후차오(Kuahuqiao) 유적에서 나온 복숭아씨를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증거로 꼽습니다 (Wikipedia). 다만 ‘복숭아가 인류가 재배한 최초의 과일’이라거나 ‘고대부터 최고의 과일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아주 이른 시기부터 사람과 함께해 온 과일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나무 자체는 낙엽이 지는 작은 키나무입니다. 보통 3~4미터 높이로 자라고, 드물게 6.5미터를 넘거나 10미터에 이르기도 하지만, 과수원에서는 관리와 수확을 쉽게 하려고 가지치기로 3~4미터 안팎에 맞춥니다 (Britannica, Wikipedia). 잎은 광택이 도는 피침형이고, 잎자루 근처에 작은 꿀샘이 있어 단물을 내어 개미 같은 곤충을 불러 모읍니다 (Britannica).

잎보다 먼저 피는 분홍 꽃, 다섯 장의 설계

복숭아꽃의 가장 큰 특징은 잎이 나기 전 이른 봄에 먼저 핀다는 점입니다 (Wikipedia). 잎이 무성해지기 전에 꽃부터 피우면 벌과 나비가 꽃을 훨씬 쉽게 찾아냅니다. 꽃의 폭은 2~3.5센티미터 정도이고, 색은 대개 분홍이지만 드물게 흰색이나 붉은색도 있습니다 (Wikipedia).

꽃 한 송이의 구조를 뜯어보면 질서가 보입니다. 꽃잎은 다섯 장, 꽃받침도 다섯 장이며, 수술은 대략 20~30개가 세 겹의 고리를 이루며 배열됩니다. 이 꽃잎과 수술은 짧은 통 모양의 받침대인 화탁통(hypanthium) 가장자리에 붙어 있습니다 (Britannica, Wikipedia). 하나님이 지으신 이 작은 꽃 한 송이 안에, 꽃가루를 내는 부분과 받는 부분, 곤충을 부르는 색과 향, 그리고 장차 열매가 될 씨방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는 셈입니다.

흔히 ‘복숭아는 벌이 없으면 열매가 안 맺힌다’고 말하지만, 이는 과장입니다. 복숭아는 스스로 꽃가루받이를 하는 자가수분이 가능하고, 다른 나무의 꽃가루를 받는 타가수분 비율은 약 5퍼센트에 그칩니다 (Wikipedia). 수정이 끝나면 하나의 씨방이 부풀어 열매가 됩니다. 복숭아는 과육이 딱딱한 핵, 곧 씨를 감싼 단단한 껍데기를 감싸고 그 핵 속에 씨가 든 핵과(drupe)입니다 (Britannica).

매끈한 껍질의 천도복숭아 열매
털이 없어 매끈한 천도복숭아. 복숭아와 같은 종이지만 유전자 하나가 달라 솜털이 자라지 않습니다. 사진: HaJunkiyada · CC BY-SA 4.0 · 출처 Wikimedia Commons

껍질을 덮은 솜털의 정체, 트리콤

복숭아를 만질 때 손끝에 묻어나는 뽀얀 솜털은 식물학에서 트리콤(trichome), 우리말로 모용이라 부르는 표피 돌기입니다. 복숭아 껍질의 트리콤은 분비 기능이 없는 비선모이며, 세포 하나로 이루어진 단세포 구조입니다. 안쪽 빈 공간은 얇고 세포벽은 두꺼워, 실험식물로 잘 알려진 애기장대의 잎 털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Molecular Horticulture 리뷰).

이 솜털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여러 몫을 합니다. 첫째, 수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트리콤이 촘촘할수록 수확한 뒤 수분이 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고, 취급 과정에서 털이 부러지면 표면의 미세한 구멍이 드러나 수분 증발이 늘어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둘째, 자외선과 건조한 바람, 높은 온도로부터 열매 표면을 물리적으로 가려 주는 차양 역할을 합니다. 셋째, 곤충이 표면을 기어 다니거나 알을 낳기 어렵게 만들어 초식 곤충의 접근을 방해합니다. 넷째, 큐티클 층과 함께 표피를 마찰과 상처로부터 지켜 줍니다 (Molecular Horticulture 리뷰).

다만 ‘솜털이 모든 병균을 막아 준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오히려 반대의 면도 있습니다. 한 연구에서는 복숭아의 트리콤을 제거했더니 수확 후 갈색썩음병, 곧 모닐리니아 곰팡이가 일으키는 병의 발생이 눈에 띄게 줄고 표면 미생물 군집의 구성이 달라졌다고 보고했습니다 (Postharvest Biology and Technology). 즉 솜털은 방어막이면서 동시에 특정 병원 미생물이 숨어 자리 잡는 은신처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의 구조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는 점은, 자연을 단순한 흑백 논리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이른 봄 분홍 꽃이 만발한 복숭아 과수원 전경
이른 봄 분홍 꽃으로 뒤덮인 복숭아 과수원. 잎이 나기 전에 꽃부터 피워 꽃가루받이 곤충을 불러 모읍니다. 사진: Vincent van Gogh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천도복숭아의 반전, 유전자 하나의 차이

이제 처음의 오해로 돌아가 봅니다. 천도복숭아(넥타린)는 복숭아와 자두의 교배종도 아니고, 사람이 유전자를 조작해 만든 과일도 아닙니다. 천도복숭아는 복숭아와 완전히 같은 종(Prunus persica)이며, 둘의 유일한 차이는 껍질에 털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Wikipedia).

이 차이는 유전자 하나로 결정됩니다. 털이 있는 복숭아 형질이 우성이고, 매끈한 천도복숭아 형질이 열성입니다. 원인 유전자는 PpeMYB25로, 식물의 털 형성을 조절하는 R2R3-MYB 계열 전사인자를 만듭니다. 이 유전자는 복숭아 5번 염색체의 이른바 ‘G 좌위’에 있으며, 연구진은 이를 약 1.1센티모건, 유전체상으로는 63만 5천 염기쌍 남짓한 구간으로 좁혀 냈습니다 (PLoS ONE, Vendramin 외).

천도복숭아에서는 이 유전자의 세 번째 엑손 안에 Ty1-copia 계열의 이른바 ‘뛰는 유전자'(LTR 레트로트랜스포존)가 끼어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고 곧바로 종결 신호가 생겨, 단백질이 112개 아미노산 길이에서 잘려 버립니다. 잘린 단백질은 제 기능을 못 하고, 그래서 털이 자라지 않는 매끈한 열매가 됩니다. 실제로 털이 있는 품종 ‘컨텐더’에서는 꽃이 피기 약 5주 전부터 이 유전자가 발현되며 이때 솜털 분화가 시작되는 반면, 천도복숭아 품종 ‘암브라’의 꽃봉오리에서는 이 유전자의 발현이 전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PLoS ONE). 그러니 천도복숭아는 실험실에서 만들어 낸 신품종이 아니라, 복숭아나무에서 자연히 생겨날 수 있는 돌연변이입니다. 실제로 복숭아 가지에서 눈돌연변이로 매끈한 열매가 열리기도 합니다. 영어에서 ‘넥타린’이라는 낱말이 인쇄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11년이지만, 원산지인 아시아에서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봅니다 (Wikipedia).

껍질과 털에 담긴 또 하나의 이야기, 알레르기

복숭아 솜털에는 뜻밖의 사연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복숭아를 먹거나 만질 때 목이 간질거리거나 입 주변이 가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 주된 원인은 프루 페 3(Pru p 3)이라는 단백질입니다. 이것은 9킬로달톤 크기의 비특이 지질전달단백질(nsLTP)로, 특히 지중해 지역에서는 복숭아 알레르기 환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여기에 반응하는 주요 알레르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ThermoFisher).

중요한 것은 이 단백질이 과육보다 껍질에 훨씬 많이 몰려 있다는 점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껍질의 지질전달단백질 농도가 과육보다 약 7배 높습니다 (Carnés 외, Allergy 2002). 게다가 복숭아 솜털 자체에도 이 단백질이 풍부해서, 껍질을 통한 감작뿐 아니라 복숭아를 다루는 과정에서 털을 들이마셔 생기는 흡입성 알레르기의 원인으로도 지목됩니다 (Molecular Horticulture 리뷰). Pru p 3은 열에 안정적이어서 익혀도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ThermoFisher).

그렇다고 해서 ‘복숭아 털이 사람을 괴롭히려고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해석입니다. 트리콤의 기능은 어디까지나 수분 조절과 마찰·해충·자외선으로부터의 보호이며, 알레르기 단백질이 껍질과 털에 몰려 있는 것은 그와 별개로 관찰되는 부수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껍질을 벗기면 증상이 누그러지는 경우가 많지만, ‘씻기만 하면 알레르기가 사라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숭아 한 알에는 잎보다 먼저 피는 다섯 장 꽃잎의 질서, 껍질을 덮은 단세포 솜털의 여러 기능, 그리고 그 솜털의 유무를 가르는 유전자 하나의 이야기가 층층이 담겨 있습니다. 천도복숭아가 별종이 아니라 같은 나무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은, 겉모습의 큰 차이가 때로 아주 작은 원인에서 비롯됨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흔한 여름 과일 하나에도 이렇게 촘촘한 짜임새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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