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 포인터의 광자는 수십억 개가 같은 자리, 같은 방향으로 겹쳐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자 두 개는 원자 안에서 완전히 같은 상태에 절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입자인데 왜 운명이 갈릴까요. 답은 입자가 타고나는 스핀이라는 값 하나에 있습니다.

사진 · SimonWaldherr,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스핀이라는 신분증
모든 입자는 스핀에 따라 두 부류로 갈립니다. 스핀이 0, 1, 2처럼 정수면 보손, 1/2, 3/2처럼 반정수면 페르미온입니다. 광자(스핀 1)·글루온·W·Z 보손·힉스 보손(스핀 0)은 보손, 전자·양성자·중성자·중성미자는 모두 스핀 1/2인 페르미온입니다. 이 분류가 겹칠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이라는 사실은 스핀-통계 정리로 불리며, 파울리의 제자 마르쿠스 피에르츠가 1939년 첫 증명을, 파울리가 이를 체계화해 1940년 논문으로 확립했습니다.

도해 · glu.kr 자체 제작(개념도)
이름의 유래도 흥미롭습니다. 1924년 인도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는 광양자 통계 논문이 거절당하자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원고를 보냈고, 아인슈타인이 번역·확장해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완성했습니다. 훗날 폴 디랙은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입자에는 보손, 1926년 페르미와 디랙이 독립적으로 도출한 통계를 따르는 입자에는 페르미온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진 · 촬영자 미상(Falguni Sarkar/The Bose Institute 제공),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사진 · Emilio Segre(AIP Emilio Segre Visual Archives), CC BY 4.0, Wikimedia Commons
파울리 배타원리는 힘이 아니다
페르미온이 겹치지 못하는 이유는 밀어내는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두 동일한 페르미온이 완전히 같은 양자 상태를 차지하면 파동함수가 반대칭이 되어 항등적으로 0이 됩니다. 그런 상태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적 귀결이지, 상호작용이 아닙니다. 파울리는 1925년 이를 전자에 한정해 처음 제시했고, 스핀-통계 정리가 모든 페르미온으로 일반화했습니다.
이 제약은 실제 압력으로도 나타납니다. 낮은 에너지 상태가 이미 채워지면 새 전자는 배타원리 때문에 더 높은 상태로 밀려나고, 위치를 좁힐수록 운동량 불확정성이 커지는 하이젠베르크 원리까지 겹쳐 전자는 온도와 무관하게 빠르게 운동합니다. 이 운동에너지가 만드는 압력이 축퇴압입니다.

도해 · glu.kr 자체 제작(개념도)
보손이 쌓이는 극한: 레이저와 보스-아인슈타인 응축(BEC)은 다르다
보손은 정반대로, 파동함수가 대칭이라 같은 양자 상태를 원하는 만큼 공유합니다. 레이저의 원리도 여기서 나옵니다. 이미 있는 광자와 같은 모드로 새 광자가 몰리는 유도방출은 보손 통계가 허용하는 현상입니다.
다만 겹칠 수 있다는 것과 거시적으로 실제 응축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레이저는 인구반전이라는 비평형 상태를 쓰고, 보스-아인슈타인 응축(BEC)은 열역학적 평형에서 다수 입자가 바닥상태로 몰리는 상전이입니다. 1995년 JILA의 코넬·위먼 팀은 루비듐-87 약 2000개를 170nK 이하로 냉각해 최초로 기체 BEC를 구현, 200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광자만의 BEC은 2010년 독일 본 대학이 별도로 실현했습니다.

사진 · NIST/JILA,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헬륨-4 vs 헬륨-3: 짝수와 홀수의 차이
이 원리는 복합입자에도 적용됩니다.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진 입자는 구성 페르미온(양성자·중성자·전자) 총수가 짝수면 보손, 홀수면 페르미온처럼 행동합니다. 헬륨-4는 총 6개로 짝수라 유효 보손이라 2.17K(람다점)에서 스스로 응축해 초유체가 됩니다. 헬륨-3은 총 5개로 홀수라 유효 페르미온이며, 초전도체 쿠퍼쌍처럼 두 원자가 짝을 이뤄야 비로소 초유체가 되는데, 그 온도는 람다점보다 약 870배 낮은 밀리켈빈대(녹는곡선인 약 34기압 부근 기준 2.491mK, 압력에 따라 전이온도가 달라집니다)입니다. 1972년 리·오셔로프·리처드슨이 이 전이를 발견해 199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축퇴압과 별의 운명

사진 · NASA, ESA, H. Bond, M. Barstow(STScI),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축퇴압은 우주 규모에서도 작동합니다. 백색왜성 시리우스B는 태양급 질량(약 1.02태양질량)이 지구만 한 부피(반지름 약 0.008태양반지름)에 압축돼 있습니다. 이 별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전자 축퇴압, 정확히는 파울리 배타원리와 전자기적 반발력이 함께 작용한 결과입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1967~68년 다이슨·레너드가, 1975년 리브·티링이 더 정교하게 증명했습니다. 이 물질의 안정성 증명은 배타원리가 없었다면 물질이 붕괴해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했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2차원 준입자 애니온은 보손도 페르미온도 아닌 분수통계를 따르며 2020년에야 실험으로 확인됐습니다. 3차원 기본·복합입자에는 적용되지 않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우주의 기본 규칙
우주의 모든 입자가 겹칠 수 있는 부류와 절대 겹칠 수 없는 부류로 나뉘는 것은 스핀이라는 값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레이저의 빛도, 원자 속에 층층이 쌓인 전자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별도 모두 이 규칙에서 나옵니다. 스핀-통계 정리는 정교하게 설계된 우주의 기본 규칙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깊은 결과를 낳는지 보여줍니다.
참고 자료
- Wikipedia(EN) — Spin–statistics theorem
- Wikipedia(EN) — Boson
- Wikipedia(EN) — Pauli exclusion principle
- Wikipedia(EN) — Bose–Einstein condensate
- Wikipedia(EN) — Helium-3
- Wikipedia(EN) — Helium-4
- CERN Courier — Putting the Pauli exclusion principle on trial
- Wikipedia(EN) — Electron degeneracy pressure
- ATLAS/CERN — The Higgs boson: a landmark discovery
- Physics World — When Bose wrote to Einstein
- arXiv:1703.10625 — Bond et al. 2017, The Sirius System and Its Astrophysical Puzzles (ApJ 840, 70)
- arXiv:1007.4088 — Klaers et al. 2010, Bose-Einstein condensation of photons in an optical microcavity (Nature 468)
- Nature Physics 16, 931 (2020) — Direct observation of anyonic braiding statis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