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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아무도 본 적 없는 것을 어떻게 실재한다고 믿었을까

원자(原子)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아토모스(atomos)’, 곧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것’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붙은 지 2000년도 더 지난 20세기 초까지도,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물리학계의 진지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아무도 원자를 직접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실재가 마침내 증명되자, 이번에는 더 당혹스러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쪼갤 수 없다’는 이름과 달리, 원자 안에는 또 다른 구조가 있었습니다. 본 적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믿게 된 과정과, 쪼갤 수 없다던 것 안에서 찾아낸 것 — 이 두 반전이 원자를 둘러싼 과학사의 핵심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흉상 사진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흉상(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정원) – 그는 스승 레우키포스와 함께 세상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알갱이(atomos)로 이루어졌다는 원자론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GAlexandrova · CC BY-SA 4.0 · 출처 Wikimedia Commons

본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실재한다고 믿었을까

원자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레우키포스(Leucippus)가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 원자론의 창시자로 지목되며, 제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가 이를 체계화·확장했다고 통상 설명됩니다. 다만 레우키포스의 생애는 사료가 워낙 부족해 실존 여부까지 논쟁된 적이 있을 정도로 불확실합니다. 이와 무관하게 인도 철학 니야야-바이셰시카 학파의 카나다(Kanada)도 ‘파라마누(paramāṇu)’라는 불가분의 입자 개념을 독자적으로 내놓았습니다. 다만 두 전통 모두 실험으로 검증된 과학 이론이 아니라 논리적 사변에서 출발한 철학이었습니다.

원자를 실험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19세기 초 영국 화학자 존 돌턴(John Dalton)입니다. 1808년 저서 ‘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에서 발표한 그의 이론은 ‘원자의 발견’이라기보다 최초의 정량적·과학적 원자론이라 부르는 편이 정확합니다. 두 원소가 둘 이상의 화합물을 이룰 때 질량비가 늘 간단한 정수비를 이룬다는 ‘배수비례의 법칙’을 근거로, 각 원소가 고유한 무게를 가진 동일한 입자로 이루어지며 화합물은 서로 다른 원자가 정수비로 결합해 만들어진다고 제안했습니다. 철학적 직관이 아니라 저울로 잰 화학 데이터가 근거였다는 점에서 고대 원자론과는 출발선이 달랐습니다.

존 돌턴의 초상화
배수비례의 법칙 등 실험 데이터를 근거로 최초의 정량적·과학적 원자론(1803~1808년)을 세운 영국 화학자 존 돌턴(1835년 초상화). 사진: Thomas Phillips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회의론을 끝낸 것은 흔들림이었다

돌턴 이후로도 한 세기 가까이 원자의 실체를 둘러싼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실증주의 관점에서,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원자를 계산을 편하게 해 주는 도구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1897년 빈 과학아카데미에서 볼츠만의 강연 직후 마흐가 “나는 원자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여러 학술 자료에 전해집니다.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역시 에너지론의 입장에서 원자·분자·이온을 에너지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수학적 허구’로 취급했습니다.

이 논쟁에 결정타를 날린 사람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1905년 논문에서, 물 위 미세 입자가 불규칙하게 떨리는 브라운 운동을 물 분자들의 무작위 열충돌로 정량적으로 설명해냈습니다. 이 예측을 실제로 확인한 사람이 프랑스 물리학자 장 페랭(Jean Perrin)입니다. 그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미세 입자의 움직임을 현미경으로 추적해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음을 확인했고, 이 과정에서 아보가드로수를 독립적으로 약 6.8×10^23으로 측정해냈습니다. 페랭은 이 공로로 192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회의론의 대표 주자였던 오스트발트도 이 결과에 설득돼 입장을 바꾸었고, 이후 저서에서 물질의 입자적 본성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갖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본 적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믿게 만든 결정적 증거는, 결국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 입자의 떨림이었던 셈입니다.

쪼개 보니 거의 다 비어 있었던 게 아니라, 질량이 한곳에 몰려 있었다

조지프 존 톰슨의 초상 사진
1897년 음극선 실험으로 원자 안에 원자보다 훨씬 가벼운 음전하 입자(전자)가 있음을 밝혀낸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 사진: Unknown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원자의 실재가 증명되자마자 더 당혹스러운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던 원자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단서가 나온 것입니다. 1897년 조지프 존 톰슨(J. J. Thomson)은 음극선을 전기장·자기장으로 휘어 보는 실험으로, 그 입자의 전하 대 질량비가 수소 이온보다 훨씬 크다는 것, 곧 원자보다 훨씬 가벼운 입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원자보다 훨씬 가볍고 음전하를 띤 입자, 곧 전자가 원자 안에 존재한다는 최초의 실험적 증거였습니다.

흔히 ‘러더퍼드가 금박 실험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서술이 아닙니다. 알파 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아 산란각을 측정하는 실험은 1908년부터 1913년 사이 한스 가이거(Hans Geiger)와 어니스트 마스든(Ernest Marsden)이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의 지도 아래 맨체스터 대학에서 직접 수행했습니다. 대부분의 알파 입자는 금박을 그대로 통과했지만 일부는 45도 이상 크게 꺾이거나 튕겨 나왔습니다. 당시 지배적이던 톰슨의 ‘건포도 푸딩’ 모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러더퍼드의 진짜 기여는 실험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그는 1911년 논문에서 원자 질량의 대부분과 양전하가 원자 부피에 비해 극히 작은 중심부에 집중돼 있다는 모형을 제안했습니다. 실험은 가이거와 마스든이, 그 해석과 원자핵 모형의 제안은 러더퍼드가 맡았던 것입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초상 사진
가이거와 마스든이 수행한 금박 실험 결과를 1911년 해석해, 원자 질량과 양전하 대부분이 아주 작은 중심(원자핵)에 몰려 있다는 모형을 제안한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 사진: Bain News Service, publisher (restored by Bammesk)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원자핵이 얼마나 작은지는 자릿수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원자핵의 반지름은 대략 10^-15미터(펨토미터), 원자 전체의 반지름은 대략 10^-10미터(옹스트롬) 수준으로, 두 값의 비율은 약 10만 배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원자 질량의 99.9% 이상이 이 원자핵에 몰려 있습니다. 전자 하나의 질량이 양성자의 약 1836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원자를 ‘거의 텅 빈 공간’이라 표현하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반지름 기준 원자의 10만분의 1에 불과한 원자핵에, 원자 질량의 거의 전부가 집중돼 있다는 뜻입니다. 이후 양자역학이 발전하면서, 전자는 정해진 궤도를 도는 입자가 아니라 원자핵 주변에 구름처럼 퍼진 확률 분포로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러더퍼드 당시의 고전적인 원자핵 그림은 이렇게 양자역학적 설명으로 보완되었습니다.

원자핵과 원자의 크기 및 질량 비율을 보여주는 개념도
원자핵의 반지름은 원자 전체의 약 10만분의 1에 불과하지만, 원자 질량의 99.9% 이상이 이 작은 원자핵에 몰려 있습니다(자체 도해). 자체 도해 · PIL(Python) 작도

보어의 그림은 역사에 남았다

러더퍼드의 원자핵 모형이 나온 지 2년 만인 1913년,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전자가 행성처럼 원자핵 주위의 정해진 궤도를 돈다는 모형을 제안했습니다. 전자의 각운동량이 특정 값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그때까지 설명 못했던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선을 정확히 재현한 모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원자의 상징 이미지로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이 이 궤도 모형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913년의 역사적 모형입니다. 양자역학이 자리 잡으면서, 전자의 위치는 특정 궤도가 아니라 원자핵 주위에 확률적으로 분포하는 구름 형태로 기술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특정 순간 전자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원리적으로 알 수 없고, 다만 발견될 확률만 계산할 수 있습니다. 보어의 모형은 원자 구조 이해의 중요한 디딤돌이었지만, 현재 과학이 말하는 원자의 실제 모습은 궤도가 아니라 구름에 가깝습니다.

보어의 역사적 궤도 모형과 현재 전자 구름 모델을 비교하는 개념도
1913년 보어가 제안한 궤도 모형(역사적 모형)과 현재의 전자 구름(확률 분포) 모델을 나란히 비교한 도해(자체 도해). 자체 도해 · PIL(Python) 작도

원자핵 내부에도 구조가 있습니다.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은 1932년 베릴륨에 알파 입자를 쏘아 나오는 중성 방사선을 분석해 중성자를 발견했고, 앞서 1920년 러더퍼드도 원자핵 질량이 양성자만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전하 없는 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후 양성자·중성자도 쿼크(quark)라는 더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1964년 제안되고 1968년 실험으로 뒷받침됐지만, 쿼크는 색가둠이라는 성질 때문에 홀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원자핵은 끝없이 쪼갤 수 있다기보다, 더 이상 낱개로 분리되지 않는 내부 구조를 가졌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는 실제로 원자를 본다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고 내부 구조를 알아낸 뒤로도 반세기 넘게, 인류는 원자를 직접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마지막 벽을 넘은 것은 1981년입니다. 게르트 비니히(Gerd Binnig)와 하인리히 로러(Heinrich Rohrer)는 스위스 IBM 취리히 연구소에서 주사 터널링 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STM)을 발명했습니다. 이 장치는 양자역학적 터널링 효과를 이용합니다. 뾰족한 탐침을 시료 표면에 아주 가까이 대면 둘이 실제로 닿지 않아도 그 사이에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데, 이 전류의 세기가 탐침과 표면 사이 거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탐침으로 표면을 훑으며 이 전류 변화를 기록하면 개별 원자 단위의 표면 굴곡을 그대로 지도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비니히와 로러는 이 발명으로 198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주사 터널링 현미경으로 촬영한 코발트 원자 1개의 이미지
주사 터널링 현미경(STM)으로 촬영한 코발트 원자 1개(파란 원뿔, 눈금자 1나노미터) – 오늘날은 개별 원자를 이런 식으로 직접 '본다'. 사진: NIST, Joseph Stroscio et al. · Public domain · 출처 Wikimedia Commons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사변으로 상상하고, 돌턴이 저울로 추정하고, 아인슈타인과 페랭이 흔들림으로 증명했던 그 원자를, 이제는 화면 위에 찍힌 하나하나의 점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인류는 100년 넘는 논쟁과 실험을 거쳤고, 실재를 확인한 뒤에는 그 안의 또 다른 정교한 질서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전자와 원자핵, 그 속의 양성자·중성자, 그리고 쿼크까지 층층이 포개진 구조 하나하나가 우연한 뒤섞임이 아니라 정밀한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점은 창조물에 내재한 정교함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던 정교한 질서가, 인간의 관찰과 추론 앞에 이렇게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내 왔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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