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3천 년도 더 전 어느 밤, 그리스군은 트로이 성문 앞에 거대한 목마 한 마리를 남겨두고 배를 타고 물러난다. 성 안 사람들은 밤새 승리를 자축하다 지쳐 잠들고, 목마 뱃속에 숨어 있던 무장 병사들이 조용히 빠져나와 성문을 연다. 기다리던 그리스 함대가 돌아오고, 트로이는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된다 — ‘트로이 목마’라는 말만 들어도 거의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정말로 있었던 일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애초에 어디에서, 언제 이렇게 상세하게 쓰였을까.
호메로스는 사실 목마를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트로이 전쟁을 정면으로 다루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목마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목마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오디세이아」인데, 그마저도 몇 군데의 짧고 간접적인 언급뿐이다. 4권에서는 헬레네가 목마 속에 숨은 그리스인들의 아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들을 시험하는 대목이 나오고, 8권에서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가 ‘에페이오스가 아테나의 도움으로 만든 목마, 오디세우스가 계략으로 이끌고 성채에 들어간 목마’를 노래하는 장면이 지나가듯 등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상세한 이야기 — 그리스군의 첩자 시논의 속임수, 라오콘의 경고와 그의 비극적 죽음, 목마가 성문을 통과하지 못해 트로이인들이 스스로 성벽 일부를 헐어냈다는 세부 묘사 — 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놀랍게도 이 서사를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처음 종합한 것은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다. 기원전 1세기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2권에서 이 이야기의 핵심 요소 대부분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스 신화’로만 알고 있는 이 유명한 장면이, 실은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시점으로부터 천 년도 더 지난 뒤 로마 시인의 손에서 완성됐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를 다시 보게 만드는 첫 번째 실마리다.
오랫동안 ‘전설’로만 남아 있던 도시
이야기의 출처가 이렇게 복잡한 만큼, 트로이라는 도시 자체도 오랫동안 문학 속에만 존재하는 전설로 여겨졌다. 실제 지도 위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확실치 않았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상상력이 빚어낸 이야기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인식이 뒤집힌 것은 19세기 후반, 한 사업가 출신 고고학자가 튀르키예 서북부의 한 언덕을 파헤치면서부터다.
슐리만, 땅속에서 트로이를 되찾다

사진: Miscellaneous Items in High Demand, PPOC, Library of Congress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독일 출신의 하인리히 슐리만은 1868년 히사를리크 땅 일부를 소유하고 있던 영국계 외교관 프랑크 캘버트를 만나면서 이 유적과 인연을 맺는다. 캘버트는 이미 이 언덕이 고대 트로이일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슐리만은 1870년 튀르키예 당국의 정식 발굴 허가도 없이 히사를리크에서 첫 삽을 뜬다. 1872년에는 대규모 인부를 동원해 유적 언덕을 가로지르는 깊이 약 13.7미터(45피트)에 달하는 대형 참호를 파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당히 거친 방식으로 발굴을 강행했다.

사진: Elizabeth Simpson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1873년 5월 말, 슐리만은 금 장신구와 왕관형 유물 등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한다. 그는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단정했고, 아내 소피아에게 그 장신구들을 착용시켜 사진까지 남겼다. 그러나 훗날 이 유물은 실제로는 프리아모스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트로이 VI~VIIa층, 대략 기원전 1300~1180년경)보다 최소 천 년 이상 앞선 트로이 II층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슐리만의 성급한 동일시는 고고학적으로 틀린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이후 슐리만과 협업한 독일 건축가 빌헬름 되르펠트가 1882년부터 1890년까지 층위발굴법을 도입해 히사를리크 유적을 트로이 I층부터 IX층까지, 세부적으로는 46개 층위로 구분했다. 1930년대에는 미국 신시내티대의 칼 블레겐이 이 층위를 한층 정밀하게 다듬으면서, 트로이 VIIa층에서 훨씬 구체적인 파괴의 흔적을 찾아낸다.
불에 탄 성벽, VIIa층이 말해주는 것

사진: ykeiko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블레겐이 확인한 트로이 VIIa층에는 장기간의 공성과 함락을 시사하는 물증이 남아 있었다. 두께가 최대 약 1.5미터에 이르는 재층, 무너진 성벽, 불에 탄 목재, 심지어 벽에 박힌 화살촉까지 발견됐다. 이 층은 기원전 약 1180년경 화재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미케네 문명과 히타이트 제국을 비롯한 동지중해 여러 문명이 거의 동시에 무너진 이른바 ‘청동기 시대 후기 붕괴'(대략 기원전 1200~1150년)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 비교적 폭넓게 확인된 사실이다.

삽화 · AI 생성(Codex/ChatGPT 구독) · 청동기시대 후기(기원전 약 1200~1150년경) 동지중해 정세 — 트로이·미케네·히타이트·이집트 권역이 함께 무너져가던 형세를 개념적으로 표현한 무문자 지도 일러스트
다만 이 파괴 연대와 시기적 동시성이 확인됐다고 해서, 그 파괴가 곧 호메로스가 묘사한 ‘그리스 연합군의 공격’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화재와 붕괴의 원인이 반드시 외부 침략자의 소행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이 지점에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한다. 트로이의 실제 규모를 둘러싼 논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88년부터 튀빙겐대의 만프레드 코르프만은 지자기 탐사 등을 근거로 청동기시대 트로이가 기존 추정보다 훨씬 커서 성채 바깥에 대규모 ‘하부 도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1~2002년 같은 튀빙겐대의 고대사가 프랑크 콜브 등이 이를 ‘증거 없는 과장·픽션에 가깝다’며 강하게 반박하면서 이른바 ‘트로이 논쟁’이 벌어졌고, 하부 도시의 실제 규모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완전히 합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히사를리크의 ‘트로이 고고 유적지’는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이 유적이 유럽 문명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지니며, 아나톨리아 문명과 지중해 세계의 최초 접촉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물증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목마’ 자체는 — 세 갈래 학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트로이라는 도시가 실재했고 VIIa층이 기원전 1180년경 폭력적으로 파괴됐다는 사실과, ‘목마’라는 장치 자체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이라는 점이다. 목마의 정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갈래의 학설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학계의 합의된 정답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1. 공성 무기였다는 해석
이미 서기 2세기,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저서 「그리스 안내기」에서 ‘에페이오스의 작품(목마)은 트로이 성벽에 파열구를 내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프리기아인(트로이인)을 완전히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고 적었다. 목마를 실은 공성 무기, 사실상 파성퇴에 대한 은유로 보는 전통이 고대부터 있었던 셈이다. 현대 역사가 마이클 우드는 「트로이 전쟁을 찾아서」에서, 고대 근동, 특히 아시리아에는 공성 무기에 동물 이름을 붙이는 관행이 있었고 파성퇴가 화공을 막기 위해 젖은 말가죽으로 덮이기도 했다는 점을 이 은유설의 방증으로 든다. 다만 아시리아식 공성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트로이 전쟁 추정 시기보다 수백 년 뒤라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해석이라는 반론도 함께 존재한다.
2. 지진을 신화화했다는 해석
오스트리아의 고전학자 프리츠 샤허마이어는 트로이 VI층의 파괴 원인이 지진, 곧 기울어진 성벽 등에서 관찰되는 흔적으로 추정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말과 지진을 함께 관장하는 신 포세이돈을 매개로, ‘목마’는 실제로는 지진에 의한 성벽 붕괴를 신화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은 오히려 트로이 성벽을 ‘쌓아준’ 신으로도 등장하기 때문에, 그가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해석과 상충한다는 지적도 있다.
3. 순수한 문학적 창작이라는 해석
토론토대의 고전학자 조너선 버지스는 「일리아스」에 목마 이야기가 아예 등장하지 않고, 「오디세이아」와 후대 서사시권의 단편들을 거치며 점차 살이 붙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그는 목마를 실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신화적·상징적 서사 장치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트로이 유적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곧 전쟁이 실재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코넬대의 역사가 배리 스트라우스는 저서 「트로이 전쟁: 새로운 역사」에서 목마를 ‘트로이의 붉은 청어’라 부르며, 거대한 목제 조형물 속에 병사들이 실제로 숨었다기보다는 히타이트식 군사 기만술에 가까운 ‘어떤 종류의 속임수’가 있었을 가능성을 하나의 가설로 제시한다. 조지워싱턴대의 고고학자 에릭 클라인은 「트로이 전쟁: 매우 짧은 소개」에서, 청동기시대 말기 트로이 인근에서 실제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구전을 거쳐 호메로스의 서사로 정착했을 뿐 목마 자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헬레네의 납치 역시 전쟁의 직접 원인이라기보다 더 큰 경제적·정치적 동기를 정당화하는 후대의 설명 장치였을 수 있다고 본다.

사진: Travelling Runes · CC BY-SA 2.0 · Wikimedia Commons
이 이야기가 얼마나 이른 시기부터, 그리고 얼마나 널리 상상됐는지를 보여주는 물증도 있다. 1961년 그리스 미코노스 섬에서 발견된 대형 테라코타 항아리는 기원전 약 675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목 부분에 바퀴 달린 목제 말과 그 안에 숨은 무장 그리스 병사 7인의 얼굴이 사각형 창 너머로 표현되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목마 도상이다. 이 이야기의 인기는 로마 시대에도 이어졌다. 서기 79년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의 여러 저택 벽화에는 목마가 성문 앞에 도착하거나 개선 행렬로 끌려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진: Gary Todd from Xinzheng, China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사진: Sharon Hahn Darlin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이 이야기의 생명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튀르키예 차나칼레 해안에는 커다란 목마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고대 유물이 아니라 2004년 영화 <트로이> 촬영에 쓰인 소품이 촬영 후 튀르키예 문화관광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3천 년 가까이 된 이야기가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그 자리로 이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론: 무엇을 확실히 알고, 무엇을 아직 모르는가
정리해보면 이렇다. 히사를리크가 고대 트로이의 자리라는 것, 그 유적의 VIIa층이 기원전 약 1180년경 격렬한 화재로 파괴됐다는 것, 그 시점이 동지중해 여러 문명이 함께 흔들린 청동기 시대 후기 붕괴와 겹친다는 것 — 이 세 가지는 고고학적으로 비교적 폭넓게 확인된 사실이다. 반면 그 파괴를 일으킨 것이 정말 그리스 연합군이었는지, 트로이 도시의 실제 규모가 어디까지였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목마’라는 장치가 실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공성 무기의 은유였는지, 지진의 신화적 형상화였는지, 순전한 문학적 창작이었는지는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 결론 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 글이 남기고 싶은 한 가지 통찰은, 이 불확실성이 결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슐리만이 파낸 땅과 호메로스·베르길리우스가 남긴 문장,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여러 학자들의 신중한 가설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증거이며, 이들을 섣불리 하나의 결론으로 봉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유적과 이야기를 정직하게 대하는 방식이다. 트로이는 분명 어딘가에 있었고, 어느 시점엔가 불탔다. 그 화재 앞에 정말 나무로 만든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는지는,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열린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참고 자료
- Trojan Horse – Wikipedia
- Archaeological Site of Troy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Did the Trojan Horse Really Exist? – HISTORY
- The Trojan horse is barely mentioned in the ‘Odyssey’ – HistoryFacts
- Discovery of Troy – World History Encyclopedia
- Priam’s Treasure – Wikipedia
- Manfred Korfmann – Wikipedia
- Was There a Trojan War? – Archaeology Magazine Archive
- The Mykonos Vase: the Oldest Image of the Trojan Horse
- Çanakkale Trojan Horse – Atlas Obscu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