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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종을 친 시계, 자격루 — 기록이 되살린 조선의 자동 물시계

밤이 깊은 경복궁, 보루각(報漏閣) 안에서 조용히 물이 흐릅니다. 항아리에 물이 차오르자 화살 모양의 살대가 떠오르고, 정해진 눈금에 이르는 순간 쇠구슬이 또르르 굴러떨어집니다. 그 작은 움직임이 지렛대를 건드리고, 마침내 나무 인형이 팔을 들어 종을 칩니다. 사람이 지켜보지 않아도, 매 시각마다 종과 북과 징이 스스로 울렸습니다. 1434년 조선이 만든 자동 시보(自擊) 물시계, 자격루(自擊漏)입니다.

자격루의 ‘자격(自擊)’은 ‘스스로 친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기계가 알아서 시각을 알린 장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1434년 장영실 등이 만든 원본은 오늘날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정교한 작동 원리를 알 수 있는 것은, 당대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복원된 자격루 전체 모형, 여러 개의 물항아리와 시보 장치가 단 위에 놓인 모습
「세종실록」 보루각기를 토대로 되살린 자격루 복원 모형. 파수호와 수수호, 시보 장치를 갖춘 자동 물시계의 전체 모습입니다. 사진: G41rn8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장영실, 노비에서 대호군까지

자격루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장영실(蔣英實)입니다. 그는 동래현의 관노(官奴) 출신으로, 어머니는 동래부의 관기(기녀)였고 아버지는 중국 원나라 지역 출신으로 전합니다. 신분의 벽이 두텁던 시대에, 그의 재주를 알아본 것은 세종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장영실은 1423년 무렵 면천(免賤)되어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상의원 별좌를 거쳐 천문 기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자격루 제작의 공으로 호군(정4품)에 오른 것이 1433년이며, 1438년 흠경각 옥루를 완성한 뒤에는 대호군(종3품)까지 승진했습니다. 노비에서 종3품 무관까지,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입니다.

조선 과학자 장영실의 동상
장영실 동상. 동래현 관노 출신으로 세종에게 발탁되어 자격루 제작에 참여하고 대호군에 올랐습니다. 사진: Himasaram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다만 자격루를 ‘장영실의 발명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자격루를 두고 “장영실(蔣英實)·이천(李蕆)·김조(金銚) 등이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다”고 명시합니다. 천문 기기 전반을 총괄한 이천, 그리고 김조(金銚) 등이 함께한 공동의 작업이었습니다. 장영실은 그 핵심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경복궁 보루각, 조선의 표준시계

자격루는 1433년(세종 15)에 완성되어,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 7월 1일(양력 8월 5일)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설치된 곳은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새로 세운 전각, 보루각이었습니다. 지금의 수정전 자리쯤에 해당합니다.

경복궁의 전각과 마당. 자격루가 설치된 보루각이 있던 곳
자격루가 놓였던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세운 보루각에서 자격루는 조선의 표준시각을 정해 알렸습니다. 사진: Epicgenius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보루각은 단순한 시계 보관소가 아니라, 조선의 표준시각을 정하고 알리는 국가 기관이었습니다. 보루각의 자격루가 시각을 알리면, 그 신호는 경복궁 문루로 전달되고, 다시 도성의 종루(지금의 보신각)로 이어졌습니다. 종루는 밤 10시 무렵의 인정(人定)에 28번, 새벽 4시 무렵의 파루(罷漏)에 33번 종을 쳐서 도성 문의 개폐와 통행금지를 알렸습니다. 자격루 하나가 도성 전체의 하루 리듬을 좌우한 셈입니다.

서울 종로의 보신각 종루와 큰 청동 종
도성의 종루(보신각). 보루각 자격루의 시각 신호는 문루를 거쳐 종루로 전달되어 인정·파루 타종으로 도성 문 개폐를 알렸습니다. 사진: Steve46814 (talk)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자격루의 제작 동기와 구조, 작동 원리는 집현전 학사 김돈(金墩)이 쓴 「보루각기(報漏閣記)」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보루각에는 김빈(金鑌)이 지은 「보루각명(報漏閣銘)」도 함께 새겨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격루의 내부 메커니즘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기록 덕분입니다.

물에서 소리로 — 자동 시보의 원리

여기서부터의 설명은 모두 「세종실록」 보루각기 등 기록에 따른 복원임을 먼저 밝혀 둡니다. 자동 시보 장치는 현존 유물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자격루는 물을 공급하는 파수호(播水壺) 4개와 그 물을 받는 수수호(受水壺) 2개로 이루어졌습니다. 크고 작은 파수호 네 개를 다단으로 배치해 물이 일정한 압력으로 흘러내리게 했고, 수수호 두 개를 번갈아 사용해 하루 종일 끊김 없이 작동시켰습니다.

물이 수수호에 차오르면, 그 위에 띄운 화살 모양의 살대(누전 漏箭, 부전 浮箭)가 부력으로 떠오릅니다. 살대의 면은 12시(時)로 눈금이 나뉘어 있어, 떠오른 높이가 곧 시각을 가리켰습니다.

파수호에서 종·북·징까지 이어지는 자격루 자동 시보 원리 흐름 도해
기록에 따른 자동 시보 메커니즘 흐름도(자체 작도). 파수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살대를 띄우면 쇠구슬이 떨어지며 지렛대와 목인을 거쳐 종·북·징을 울립니다. 도해 · glu.kr 자체 작성

핵심은 그 다음입니다. 살대가 정해진 눈금에 이르면 위에 얹힌 방목(方木) 속 기구를 건드려 작은 쇠구슬을 떨어뜨립니다. sillokwiki가 인용한 보루각기의 표현을 빌리면, “작은 구슬이 구멍으로 떨어져 그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가 열리고, 큰 구슬이 떨어져 자리 밑에 달린 짧은 통에 굴러떨어지면서 숟가락 같은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에서 스스로 시간을 맡은 신의 팔을 치받으면서 종이 울린다”고 합니다. 작은 구슬이 큰 구슬을, 큰 구슬이 지렛대를, 지렛대가 나무 인형의 팔을 — 이렇게 운동이 연쇄적으로 전달되어 마침내 종을 치는 것, 이것이 ‘스스로 친다(自擊)’의 정체입니다.

종·북·징, 그리고 12지신

시각을 알리는 방식은 낮과 밤이 달랐습니다. 낮과 밤에 공통으로 쓰는 12시(時)는 종을 쳐서 알렸고, 밤에는 경(更)마다 북을, 점(點)마다 징을 쳐서 야간의 경점법(更點法) 시각을 알렸습니다. 시는 종, 경은 북, 점은 징 — 세 명의 목인(木人, 나무 인형)이 각각 하나씩 맡았습니다.

소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2지신(十二神) 인형이 한 시(時)씩 12시를 나누어 담당해, 해당 시각이 되면 그 신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며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들고 나오고, 십이지에 해당하는 신이 일어섰습니다. 보루각기는 “자시(子時)에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자시패를 들고 나오고 서신(鼠神, 쥐신)은 그 앞에서 일어선다”고 적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중의 시보 장치였던 셈입니다.

복원 자격루의 측면. 아래 물항아리와 위층 자동 시보 장치 구조
복원 자격루를 옆에서 본 모습. 아래쪽 물항아리에서 올라온 물의 힘이 위층의 자동 시보 장치로 전달되어 종·북·징을 울리는 구조를 재현했습니다(복원 모형). 사진: G41rn8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여기에 더해, 낮과 밤의 길이가 계절마다 달라지는 문제도 풀어야 했습니다. 기록과 복원 연구에 따르면, 살대 위에 얹는 방목 속 좌·우 두 동판(銅板)으로 절기를 보정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왼쪽 동판에 작은 구슬을 받는 구멍 12개, 오른쪽 동판에 큰 구슬을 받는 구멍 25개가 뚫려 있었고, 동판을 절기에 따라 갈아 끼웠다고 전합니다. 2022년 국립중앙과학관(윤용현)은 2021년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동판과 구슬방출장치를 근거로 이 부분(주전 籌箭)을 복원하면서, 절기에 맞춰 여러 개의 주전을 번갈아 썼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장치를 두고 자료마다 표기가 조금씩 다르므로, 세부 수치는 출처를 함께 헤아려 읽는 편이 좋습니다.

세계 최초는 아니지만 — 자격루의 자리

자격루를 두고 종종 ‘세계 최초의 자동 물시계’라는 수식이 붙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중국 북송의 소송(蘇頌)과 한공렴이 만든 수운의상대(水運儀象臺, 1088)는 물의 힘으로 작동한 자동 천문시계로, 자격루보다 약 346년이나 앞섭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알자자리(al-Jazari)가 1206년 저술한 책에 코끼리 시계를 비롯한 자동 물시계를 남겼는데, 이 역시 자격루보다 두 세기 이상 앞선 선례입니다. 매 시각 자동인형이 소리를 내는 장치라는 점에서 자격루와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자격루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국 안에서 그 자리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718년(성덕왕 17)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고 누각박사 같은 전문가가 물시계를 직접 관측해 시각을 알렸습니다. 고려의 누각도, 조선 초의 경루(更漏)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보고 알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자격루는 이런 인적 작업을 기계의 자동 타격으로 대체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표현대로 “인형이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게 되면서 이후 물시계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사람이 있을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자격루는 세계 최초는 아니지만,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스스로 종·북·징을 울린 정교한 자동 시보 장치이자 경복궁 보루각에 설치된 조선의 표준시계였고, 삼국·고려의 물시계가 사람이 시각을 알리던 것과 달리 자동 타격을 구현해 기록상 한국에서 처음 알려진 사례라는 점입니다.

원본은 사라지고, 물항아리만 남다

안타깝게도 1434년 장영실 등이 만든 원본 자격루는 오늘날 전하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세종 때 만든 자격루는 모두 소실되고 없다”고 단정하며, 우리역사넷도 “장영실이 만든 것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고 적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1434년 원본은 문종 때 고장 나고 단종 때 보수하지 못해 방치·포기되었습니다. 이후 자격루는 거듭 고쳐 만들어지며 쓰였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며 자동 시보 장치 부분이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전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자격루는 무엇일까요. 1536년(중종 31) 자격장 박세룡 등이 다시 만든 재제작품의 일부입니다.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물항아리류만 남았습니다. 청동 파수호 3점과 수수호(수수통) 2점, 그리고 석재 받침이 전부입니다. 부전·쇠구슬·동판·목인·종/북/징 같은 자동 시보 장치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앞서 설명한 정교한 메커니즘이 모두 ‘기록 기반 복원’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현존하는 청동 자격루 물항아리, 둥근 형태의 파수호와 수수호 유물
현존하는 자격루 유물(국보 제229호 '창경궁 자격루'). 용무늬가 새겨진 청동 물항아리(파수호·수수호)만 남았고, 부전·쇠구슬·목인 같은 자동 시보 장치는 전하지 않습니다. 사진: User:Gapo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이 현존 유물의 정식 명칭은 ‘창경궁 자격루'(국보 제229호)로, 1985년 8월 9일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청동 파수호는 지름 93.5cm·높이 70cm, 수수호는 지름 46cm·높이 40.5cm입니다. (치수는 자료마다 표기가 갈리므로 한 출처의 수치를 따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 광명문 안으로 옮겨 전시되다가, 2018년 6월부터 약 1년 7개월에 걸친 보존처리를 마치고 2020년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보존처리 과정에서 수수호 표면의 명문이 새로 판독되어, 1536년 재제작에 참여한 12명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그중 이공장·안현·김수성·채무적 등 4명은 이때 새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유물조차 여러 장인의 공동 작업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들은 1536년 재제작의 참여자이지, 1434년 원본을 만든 장영실·이천·김조와는 다른 사람들임을 헷갈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록이 되살린 시계

자동 장치가 사라진 자격루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결국 기록이었습니다. 건국대 산학협력단의 남문현 교수와 약 30명의 전문가는 「세종실록」 보루각기를 토대로 작동하는 복원 모형을 만들었고, 2007년 11월 국립고궁박물관 개관에 맞춰 공개했습니다. 2022년에는 인사동 출토품을 근거로 주전 부분이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588년 전 사람들이 남긴 글이, 잃어버린 기계를 오늘날 되살린 것입니다.

맺으며 — 한 줄의 기록이 지킨 시간

자격루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장영실도, 청동 항아리도 아닐지 모릅니다. 세종이 노비의 재주를 알아본 안목, 시각을 자동으로 알리려 한 정교한 설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글로 남긴 김돈의 「보루각기」 — 이것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장영실은 1442년(세종 24) 그가 감독한 임금의 가마(안여 安輿)가 부러지는 사고로 파직된 뒤,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취가 끊깁니다. 그가 만든 원본 자격루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계가 어떻게 스스로 종을 쳤는지는, 기록 덕분에 우리가 여전히 알고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기계도 시간 앞에 부서졌지만, 그것을 적어 둔 한 줄의 글은 600년을 건너 시간을 지켜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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