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월의 어느 겨울날, 런던 해군본부 건물의 한 방에서 두 암호분석관이 독일어 암호 전보 한 뭉치를 앞에 두고 숨을 죽였다. 숫자의 나열 속에서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그리고 ‘일본’이라는 단어가 하나씩 떠오르자,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손에 쥐었는지 직감했다. 독일 외무장관이 멕시코에 미국을 겨냥한 동맹을 은밀히 제안한 전보였다. 그러나 이 한 통이 곧바로 미국을 세계대전으로 밀어 넣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단순화다. 정작 이야기를 팽팽하게 만드는 것은, 이 문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영국이 벌인 이중의 은폐 공작과, 끝내 발신자 자신이 그 진위를 인정해 버린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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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 멕시코에 건넨 제안
전보를 보낸 사람은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이었다. 1917년 1월 16일, 그는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 요한 폰 베른슈토르프에게 암호문을 보냈다. 대서양 케이블을 모두 잃은 독일은 윌슨 대통령이 평화 교섭용으로 허락한 미국 국무부의 외교 회선을 빌렸고, 전보는 베를린에서 코펜하겐과 영국을 거쳐 워싱턴에 닿았다. 베른슈토르프는 1월 19일 이를 상업 전신으로 멕시코시티의 독일 공사 하인리히 폰 에카르트에게 다시 보냈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제안의 뼈대는 세 가지였다. 첫째, 독일은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전을 재개한다. 둘째, 그럼에도 미국을 중립에 붙들어 두려 애쓰되, 만약 실패한다면 멕시코에 동맹을 제안한다. ‘함께 싸우고 함께 강화한다’는 원칙 아래 넉넉한 재정 지원을 약속하며, 멕시코가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도록 양해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멕시코 대통령이 스스로 일본을 이 동맹에 끌어들이고 독일과 일본 사이를 중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독일이 그 세 개 주를 ‘선물’로 보장한 것이 아니라, 멕시코가 직접 ‘재정복’하는 것을 지원하고 인정하겠다는 취지였다. 또한 원문에는 캘리포니아가 등장하지 않는다.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는 1846~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멕시코가 상실한 남서부 영토였다(국립 1차대전 박물관).
40호실, 숫자의 벽을 허물다
이 전보를 가로챈 것은 영국 해군정보부의 암호해독 조직 ’40호실’이었다. 40호실이라는 이름은 이 조직이 자리 잡은 옛 해군본부 건물의 방 번호에서 왔다(미 국가안보국). 개전 직후인 1914년 10월, 러시아가 발트해에서 좌초한 독일 순양함 마그데부르크호에서 건진 해군 암호책 한 부를 영국에 넘겼고, 이것이 40호실이 빠르게 자리를 잡는 발판이 되었다(국립 1차대전 박물관). 그 배경에는 개전 직후 영국이 독일의 대서양 해저 케이블을 끊어, 독일이 우회 전신 경로에 의존하도록 만든 사정이 있었다(국립 1차대전 박물관). 케이블을 잃은 독일은 중립국의 전신망과 미국의 외교 회선까지 빌려 대서양 너머로 전문을 보내야 했는데, 그 우회로의 상당 부분이 하필 영국을 거쳤다. 감청의 그물은 그렇게 촘촘히 드리워져 있었다.
전보에는 두 개의 암호 체계가 얽혀 있었다. 베를린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구간에는 독일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신형 코드 0075가 쓰였고, 워싱턴에서 멕시코시티로 재전송된 판본에는 구형 코드 13040 계열이 사용되었다. 40호실은 이미 이 구형 코드를 상당 부분 재구성해 둔 상태였다. 암호분석관 나이절 드 그레이와 성직자 출신 윌리엄 몽고메리가 며칠에 걸쳐 부분 판독에 매달렸다(영문 위키백과).
흔히 ‘독일 요원이 페르시아에 버리고 간 코드북 한 권 덕분에 전보를 풀었다’는 극적인 이야기가 되풀이되지만, 해독에 쓰인 외교 암호책이 어디서 왔는지는 지금도 설이 엇갈린다. 영국 국립기록원은 전쟁 중에는 출처를 숨기는 일이 정보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게 여겨져, 40호실의 운영에 관한 여러 사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영국 정부 역사블로그). 분명한 것은 한 권의 행운만으로 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투와 첩보로 노획한 암호책, 오랜 부분 재구성, 끈질긴 분석이 함께 쌓여 이 해독을 가능하게 했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사진: Bain News Service(미국 의회도서관)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두 개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위장
영국은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사실 영국은 독일 암호를 푸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의 외교 전신선까지 엿듣고 있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과의 평화 교섭에 미국 케이블을 쓰도록 독일에 허용했는데, 독일은 바로 그 통로에 이 전보를 실어 보냈다. 만약 전보를 곧바로 공개하면 ‘미국 케이블을 감청했다’는 사실과 ‘독일 암호를 해독했다’는 사실이 동시에 드러날 판이었다.
영국은 두 비밀을 모두 감추기 위해 우회로를 만들었다. 해군정보부장 윌리엄 레지널드 홀은 베른슈토르프가 멕시코로 다시 보낸 전보의 사본이 멕시코시티 전신국에 남아 있으리라는 데 착안했다. 이 판본은 날짜·수신인·서명이 원본과 조금씩 달라, 이것을 내놓으면 전보가 워싱턴과 멕시코 사이 어디선가 새어 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2월 10일, ‘H 씨’로만 알려진 멕시코의 영국 요원이 전신국 직원을 매수해 이 사본(구형 코드 13040 계열)을 손에 넣었다. 영국은 이 멕시코 수신본을 입수 경로로 내세움으로써, 암호 해독과 케이블 감청이라는 두 사실을 모두 가릴 수 있었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그 결과 영국은 1월 중순에 이미 전보의 요지를 파악하고도 한 달 넘게 이를 쥐고만 있었다. 위장 경로가 마련된 뒤에야, 그들은 이 문서를 미국의 손에 넘길 준비를 마쳤다.
폭로, 그리고 발신자의 자백
1917년 2월 23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주영 미국대사 월터 하인스 페이지에게 전보를 건넸고, 페이지는 이튿날 이를 워싱턴의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에게 타전했다(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윌슨은 전보를 공개하기로 했고, 3월 1일 「뉴욕 타임스」는 ‘독일, 미국을 겨냥한 동맹을 꾀하다’라는 제목 아래 전문을 실었다. 여론은 들끓었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사진: 미국 국립기록원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당연히 ‘영국이 미국을 끌어들이려 꾸며 낸 날조’라는 의심이 뒤따랐다. 상원의원 벤저민 틸먼은 ‘일본이 멕시코, 독일과 손잡고 미국을 친다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라며 전보를 대놓고 날조라 불렀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그러나 이 의혹은 뜻밖의 방식으로 가라앉았다. 발신자인 치머만 본인이 진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는 3월 3일 자신이 전보를 썼다고 시인했고, 3월 29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전보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위조설은 그렇게 스스로 무너졌다(국립 1차대전 박물관).

그림: Rollin Kirby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왜 그가 순순히 시인했는지는 지금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 한마디가 남긴 효과는 분명했다. 참전에 반대하며 ‘영국이 꾸민 술책’을 의심하던 미국 안의 목소리는 발신자 스스로의 인정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사진: Harris & Ewing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멕시코의 냉정한 계산
독일이 하필 멕시코를 상대로 고른 데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반세기 전 전쟁으로 남서부의 넓은 땅을 빼앗긴 멕시코라면, 잃은 영토를 되찾자는 제안에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의 이 셈법은 멕시코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다.
정작 제안을 받은 멕시코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멕시코 대통령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이 문제를 군사위원회에 넘겨 검토하게 했다. 위원회의 결론은 동맹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냉정하고 실질적이었다.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가 압도적이었고, 영국의 해상 봉쇄 탓에 독일이 약속한 지원이 멕시코까지 닿을 방법이 없었다. 설령 세 개 주를 ‘되찾는다’ 해도 영어를 쓰는 주민들을 통합하기 어려웠으며,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의 마찰도 부담이었다. 멕시코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하고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영문 위키백과). 동맹의 다른 한 축으로 거론된 일본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가 나서,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없으며 받았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 통의 전보가 아니라, 결합된 압력
그렇다면 미국을 참전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보 하나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독일은 예고대로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전을 재개했고, 미국 상선들이 잇따라 격침되었으며, 미국은 2월 3일 독일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 전보는 이 흐름 위에 결정적인 촉매로 얹혔다.
전보의 고유한 기여는 여론의 지형을 바꾼 데 있었다. 멀리 유럽의 일로만 보이던 전쟁이, 이웃 멕시코를 끌어들여 미국 땅을 넘보는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국립 1차대전 박물관). 윌슨은 4월 2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참전을 요청하며, 이 전보를 독일이 ‘바로 우리 문 앞에 적을 일으키려 한’ 증거로 들었다(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상원은 4월 4일 82 대 6으로, 하원은 4월 6일 373 대 50으로 이를 가결했고, 윌슨은 같은 날 선전포고에 서명했다(영문 위키백과).

사진: Keystone View Company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암호사가 데이비드 칸은 이 사건을 두고 ‘다른 어떤 단일 암호 해독도 이토록 거대한 결과를 낳은 적이 없다’고 평했다. 여러 기관은 이를 1차대전에서 영국이 거둔 최대의 정보 승리로 꼽는다(국립 1차대전 박물관, 미 국가안보국). 눈에 보이지 않는 신호정보가 전장의 포성 못지않게 전쟁의 향방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 준 이른 사례이기도 했다.
치머만 전보의 이야기는 단순한 첩보 무용담이 아니다. 그것은 한 통의 문서가 무제한 잠수함전이라는 또 다른 압력과 맞물려 어떻게 거대한 전환을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 전환을 만들기 위해 정보기관이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숫자로 된 몇 줄의 암호가 결국 대양 건너의 전쟁을 바꾸어 놓았고, 그 여파는 20세기의 국제 질서를 새로 그리는 데까지 이어졌다. 말과 뜻을 짓고 또 풀어내도록 지어진 존재가 남긴 기호 몇 줄이 이토록 큰 역사를 움직였다는 사실은, 사람의 작은 선택 하나에 실리는 무게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참고 자료
- The Zimmermann Telegram (U.S. National Archives)
- FRUS 1917, Supplement 1, Document 158 (U.S. Department of State, Office of the Historian)
- Zimmermann Telegram (Wikipedia)
- The Zimmermann Telegram (National WWI Museum and Memorial)
- The Zimmermann Telegram and Room 40 (UK Government History Blog)
- United States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1917) (Wikipedia)
- Zimmermann Telegram (Encyclopaedia Britannica)
- The Zimmermann Telegram and Other Events Leading to America’s Entry into World War I (미 국립기록원 「프롤로그」, 2016)
- The Zimmermann Telegram (미 국가안보국 Cryptologic Quarterly, 기밀 해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