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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1377년 청주,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선 한 권의 책

독일 마인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42행 성서(B42)를 찍어낸 것은 1452~1455년 무렵입니다. 1455년 3월, 훗날 교황 비오 2세가 되는 인물이 그 낱장을 직접 보았다는 동시대 기록이 연대의 근거로 남아 있지요. 그런데 그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1377년, 고려의 한 지방 사찰에서 이미 금속활자로 한 권의 책이 인쇄되었습니다. 충청도 청주(淸州)의 흥덕사(興德寺)에서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줄여서 직지(直指) 또는 직지심체요절입니다.

이 책은 오늘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공인되어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이를 ‘the world’s oldest extant book printed with movable metal type'(현존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라 표현하고, 직지를 소장한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역시 ‘oldest known book printed with movable metal type’라 적습니다.

여기서 곧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직지는 흔히 ‘세계 최초의 활자 인쇄’로 소개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직지의 정확한 위상은 ‘최초’가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입니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직지를 둘러싼 가장 흔한 오해의 지점이며, 이 글이 가장 정성껏 풀어내려는 매듭이기도 합니다.

직지심체요절 하권. 1377년(고려 우왕 3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직지심체요절 하권. 1377년(고려 우왕 3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백운화상 경한 편(촬영: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직지란 무엇인가 — 한 노선승이 추려 엮은 깨달음의 요체

직지를 엮은 이는 고려 말의 선승(禪僧) 백운화상 경한(景閑, 1298~1374)입니다. 그는 임제종(臨濟宗) 계통의 선풍을 익힌 노승으로, 일흔이 넘은 1372년에 역대 부처와 조사(祖師)들의 어록과 게송(偈頌) 가운데 선(禪)의 핵심을 담은 대목들을 손수 추려 엮었습니다. 이 추려 엮는 작업을 한자로 초록(抄錄)이라 합니다.

책의 정식 이름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곧 ‘부처와 조사들이 가리킨, 마음의 본바탕(心體)에 대한 요긴한 구절들’이라는 뜻입니다. 제목의 ‘직지(直指)’는 선불교의 유명한 표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 — 에서 왔습니다. 경전의 문자에 매이지 않고 마음을 곧장 들여다보아 깨달음에 이른다는 선의 정신이, 그대로 책의 이름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직지는 어떤 줄거리가 있는 저술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의 어록(語錄)과 게송을 한데 모은 일종의 법어집(法語集)입니다.

직지 본문 펼친 면. 부처와 역대 조사들의 깨달음을 가려 뽑은 선(禪) 어록·게송 모음이다.
직지 본문 펼친 면. 부처와 역대 조사들의 깨달음을 가려 뽑은 선(禪) 어록·게송 모음이다.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경한이 1372년에 글을 추려 엮은 뒤, 그가 입적(入寂)하고 3년이 지난 1377년(고려 우왕 3년) 7월, 제자인 석찬(釋璨)과 달담(達湛)이 스승의 뜻을 기리며 이 책을 금속활자로 간행했습니다. 여기에는 시주(施主)로 나선 비구니 묘덕(妙德)의 도움이 컸습니다. 책은 본디 상·하 두 권으로 만들어졌으나, 금속활자로 찍은 판본 가운데 오늘날 전하는 것은 하권(권하) 한 책뿐입니다. 그마저도 온전하지 않아, 전체 39장 가운데 첫 장(제1장)이 떨어져 나가 38장만 남았습니다. 그 단 한 책이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금속활자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었나

책을 인쇄하는 방식을 크게 둘로 나누면 목판(木版) 인쇄와 활자(活字) 인쇄가 있습니다. 목판은 한 면(面) 전체를 통판 하나에 통째로 새기는 방식입니다. 글자가 자리를 옮길 일이 없으니 같은 책을 거듭 찍기엔 좋지만, 새 책을 낼 때마다 처음부터 모든 판을 다시 새겨야 합니다. 반면 활자는 글자 하나하나를 낱개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한 본문에 맞춰 판에 배열해 찍고, 다 쓰면 풀어 다음 책에 다시 쓰는 방식입니다.

낱개 활자를 재배열하고 재사용한다는 점이 활자 인쇄의 핵심입니다. 글자 수가 많고 분량이 큰 책일수록, 또 여러 종류의 책을 두루 찍어야 할수록 활자의 효율은 빛을 발합니다. 한번 만들어 둔 활자 묶음으로 이 책 저 책을 갈아 끼워 찍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직지를 재현한 금속활자 인쇄판 복제품. 낱개로 주조한 활자를 짜 맞춰 한 판을 만들었다.
직지를 재현한 금속활자 인쇄판 복제품. 낱개로 주조한 활자를 짜 맞춰 한 판을 만들었다.
Kjoonlee · CC BY 4.0 · Wikimedia Commons · 출처

그렇다면 고려 사람들은 금속활자를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직지에 쓰인 기법은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정은 이렇습니다. 먼저 밀랍(蜜蠟, 벌집에서 얻는 부드러운 왁스) 막대에 글자를 도드라지게 양각(陽刻)해 어미자(어미가 되는 본보기 글자)를 만듭니다. 이 밀랍 어미자를 주물사(鑄物砂, 거푸집용 모래흙)로 빈틈없이 감싸 굳힌 뒤, 열을 가해 안쪽의 밀랍을 녹여 빼냅니다. 그러면 글자 모양 그대로의 빈 공간(빈 틀)이 거푸집 안에 남지요. 그 빈 공간에 끓는 청동 쇳물을 부어 식히면, 밀랍이 있던 자리에 똑같은 모양의 금속 활자가 주조되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술의 뿌리입니다. 밀랍을 녹여 빼내고 그 자리에 쇳물을 부어 형상을 떠내는 방식은, 사찰에서 불상(佛像)과 범종(梵鐘)을 만들던 오랜 청동 주조 전통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 고려의 절들은 거대한 부처상과 종을 빚어 온 금속 주조의 노하우를, 손톱만 한 작은 활자에 그대로 응용한 셈입니다. 종교 공예의 기술이 인쇄 기술로 건너간 것이지요.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전시된 고려 금속활자. 사찰에서 불상·범종을 주조하던 밀랍주조법으로 한 자씩 만들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전시된 고려 금속활자. 사찰에서 불상·범종을 주조하던 밀랍주조법으로 한 자씩 만들었다.
Ken Eckert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이 밀랍주조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현대에 와서 직접 검증되었습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바로 이 밀랍주조 방식으로 직지를 찍는 데 쓰였을 금속활자 약 3만 자를 복원해 냈습니다. 옛 기법을 되살려 손에 잡히는 활자로 재현해 보인 것입니다.

‘현존 가장 오래된’의 정확한 의미 — 최초가 아닌 이유

이제 가장 중요한 매듭을 풀 차례입니다. 직지가 ‘세계 최초’가 아닌 까닭은, 활자 인쇄도 금속활자도 직지보다 앞선 사례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활자 인쇄 자체의 시초는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은 1040년 무렵 점토를 구워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 곧 진흙 활자를 고안했습니다. 이 사실은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의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활자라는 발상 자체는 직지보다 무려 300여 년 앞서 동아시아에 등장해 있었던 것이지요.

금속활자로 좁혀 보아도 직지가 처음은 아닙니다. 고려에서는 1234년 무렵, 최윤의(崔允儀) 등이 엮은 예서(禮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을 주자(鑄字,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이는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남아 있는 내용으로, 직지보다 무려 140여 년이나 앞섭니다. 그렇다면 왜 상정고금예문이 아니라 직지가 ‘가장 오래된’일까요. 답은 단순하면서도 결정적입니다. 상정고금예문은 실물이 단 한 부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록으로만 전할 뿐 현물이 사라진 책은 ‘현존(現存)’의 자격을 갖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 ‘최초(first)’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oldest extant)’의 경계가 있습니다. 직지는 인류가 금속활자로 무언가를 찍은 첫 사례가 아닙니다. 그러나 금속활자로 찍힌 책 가운데, 오늘날까지 실물이 살아남아 손에 쥐고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최초’는 기록까지 포함한 시간의 처음을 가리키지만, ‘현존 가장 오래된’은 지금 우리 눈앞에 실재하는 것들 사이의 처음을 가리킵니다. 유네스코와 BnF가 한결같이 ‘extant’, ‘known’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뉴욕공립도서관 렌녹스본). 독일 마인츠에서 1452~1455년 인쇄돼 직지보다 약 78년 늦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뉴욕공립도서관 렌녹스본). 독일 마인츠에서 1452~1455년 인쇄돼 직지보다 약 78년 늦다.
NYC Wanderer (Kevin Eng) · CC BY-SA 2.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이 경계를 분명히 해 두면 구텐베르크와의 비교도 정확해집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1455년 무렵의 산물이고 직지는 1377년의 산물이니, 그 간격은 1455에서 1377을 뺀 78년입니다. 즉 직지는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다만 이것이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말은 아닙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압축 나사식 프레스, 기름 잉크, 대량 조판 체계와 맞물려 유럽 전역으로 폭발적으로 퍼지며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기 다른 맥락으로 꽃핀 두 인쇄 문명을, 우열이 아니라 나란한 성취로 바라보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흥덕사와 잃어버린 절터

직지를 찍어낸 곳, 흥덕사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직지 하권의 끝에는 간행 경위를 밝힌 간기(刊記)가 붙어 있는데, 거기에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취지가 또렷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 흥덕사가 정확히 어디에 있던 절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간기에 이름은 남았으되, 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였기 때문입니다.

청주 흥덕사지에 복원된 전각. 1377년 이곳 흥덕사에서 직지가 인쇄되었다.
청주 흥덕사지에 복원된 전각. 1377년 이곳 흥덕사에서 직지가 인쇄되었다.
Lawinc82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잃어버린 절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5년입니다.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청주 운천동 일대를 발굴 조사하던 중, ‘서원부 흥덕사(西原府 興德寺)’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청동 금구(禁口, 절에서 시각을 알리던 쇠북)가 출토되었습니다. 같은 절터에서는 ‘황통(皇統) 10년'(1150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진 청동 유물도 함께 나와 절의 내력을 뒷받침했지요. 서원부는 청주의 옛 이름이니, 금구에 새겨진 ‘흥덕사’라는 글자는 다름 아닌 직지를 찍은 그 절의 이름이었습니다. 간기에만 적혀 있던 흥덕사의 실재가, 땅속에서 나온 청동 명문으로 600여 년 만에 확증된 순간이었습니다.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청동 쇠북(금구). '흥덕사' 명문이 새겨진 이런 유물 덕분에 1985년 발굴에서 이 절터가 직지의 간행지임이 확인되었다.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청동 쇠북(금구). '흥덕사' 명문이 새겨진 이런 유물 덕분에 1985년 발굴에서 이 절터가 직지의 간행지임이 확인되었다.
Forcoolife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 출처

발굴의 결과는 빨랐습니다. 절터는 1986년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고, 1987년부터 복원과 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흥덕사지 바로 곁에는 직지와 한국 인쇄 문화를 기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이름만 남았던 절이 실재하는 유적지로, 그리고 그 인쇄 전통을 되살리고 연구하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직지 금속활자 약 3만 자의 복원도 바로 이 박물관의 작업이었습니다.

프랑스로 간 직지, 그리고 한 사서의 재발견

그렇다면 청주에서 찍힌 직지 하권은 어떻게 파리의 도서관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이 대목은 종종 ‘약탈’이나 ‘도난’으로 단정되곤 하지만, 실제 경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중립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한 프랑스 외교관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는 1888년 전후 서울에 재임하면서 한국의 고서(古書)를 수백 권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 직지 하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그의 수집품은 그의 손을 떠나 경매 시장으로 흘러갑니다. 1911년 3월, 파리의 드루오(Drouot) 경매장에서 직지는 보석상이자 장서가였던 앙리 베베르(Henri Vever)에게 180프랑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베베르는 유언(유증, 遺贈)을 통해 자신이 소장하던 직지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고, 직지는 1952년 BnF의 장서로 정식 편입되었습니다.

즉 직지가 프랑스에 있게 된 과정은 ‘수집 → 경매 낙찰 → 유증 기증’이라는 일련의 연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약탈이나 도난으로 못 박기보다는, 사실의 연쇄 그대로 기술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살 라브루스트 열람실. 직지 하권은 1950년 앙리 베베르의 기증을 거쳐 이곳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살 라브루스트 열람실. 직지 하권은 1950년 앙리 베베르의 기증을 거쳐 이곳에 소장돼 있다.
Stefan Drößler · CC BY 4.0 · Wikimedia Commons · 출처

그러나 파리로 건너간 직지는 한동안 그 진가가 묻혀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세상에 길어 올린 이가 바로 재불 한국인 사서 박병선(朴炳善) 박사입니다. 그는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도서관에 잠들어 있던 직지를 주목했고, 이것이 단순한 옛 책이 아니라 금속활자로 찍힌 인쇄본임을 식별하고 고증해 냈습니다. 그리고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도서의 해’였던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직지를 국제 무대에 올렸습니다. 구텐베르크보다 앞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 세계 학계 앞에 처음으로 그 존재를 또렷이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박병선 박사의 고증과 노력은 마침내 국제적 공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직지는 2001년 9월 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되었습니다. 나아가 2004년에는 기록유산 보존에 공헌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유네스코/직지 세계기록유산상(Jikji Prize)’이 제정되어, 직지라는 이름은 한 권의 책을 넘어 인류 기록 문화를 기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 — 직지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

직지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일러 줍니다. 하나는 사실의 정확함입니다. 직지는 ‘세계 최초의 활자 인쇄’가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입니다. 활자라는 발상은 북송의 필승에게, 금속활자의 앞선 기록은 고려의 상정고금예문에 이미 있었습니다. 다만 그 실물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1377년 청주 흥덕사가 찍은 한 권만이 살아남아 우리 손에 닿았습니다. ‘최초’가 아니라 ‘현존 가장 오래된’이라는 그 정확한 자리매김을 기억하는 것 —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직지에서 배워 갈 한 가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직지 하권은 여전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직지가 기원국(起源國)으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환수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프랑스 측에서는 이미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적법하게 소장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어느 쪽도 가볍지 않은 이 두 시선 사이에서 직지의 반환은 아직 풀리지 않은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700여 년 전 한 노선승이 추려 엮은 깨달음의 책은, 오늘도 인쇄 문명의 기원과 문화유산의 귀속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우리 앞에 조용히 던지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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