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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원리가 책으로 남은 세계 유일의 문자

글자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일은 드물다

세상의 거의 모든 문자는 출생 기록이 없다. 알파벳은 고대 페니키아 상인들의 손에서 수백 년에 걸쳐 굴러왔고, 한자는 갑골(甲骨)에 새겨진 점복(占卜)의 흔적에서 점점 자라났다. 누가 처음 그었는지, 어느 해에 만들어졌는지, 어떤 생각으로 그 모양을 골랐는지 — 대부분의 문자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발명’되었다기보다 강물처럼 ‘흘러왔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예외가 있다. 만든 사람과 만든 해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왜 이 글자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설계 원리까지 한 권의 책으로 적어 남긴 문자가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이름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글자를 만든 동기, 자음과 모음을 각각 어떤 원리로 빚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합쳐 음절을 이루는지를 설명한 해설서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다. 이 해설서가 함께 전한다는 사실이 훈민정음을 문자사(文字史)에서 유난히 특별한 자리에 올려놓는다.

훈민정음 해례본 첫머리의 어제서문(御製序文).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해 백성을 위해 새로 스물여덟 자(二十八字)를 만든 뜻을 밝혔다.
훈민정음 해례본 첫머리의 어제서문(御製序文).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해 백성을 위해 새로 스물여덟 자(二十八字)를 만든 뜻을 밝혔다.
세종(어제) · 촬영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다만 처음부터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우리가 오늘 ‘한글’이라 부르는 그 이름은 15세기에는 없었다. 세종 때의 사람들은 이 글자를 ‘훈민정음’ 또는 ‘언문(諺文)’이라 불렀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초, 주시경(周時經)을 비롯한 국어연구학회 학자들이 새로 붙인 근대의 작명이다. 그러니 이 글의 15세기 이야기에서는 그 시대의 이름, 훈민정음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세종이 만든 글자

창제(創製)의 해는 1443년, 세종 25년의 음력 12월이다. 『세종실록』은 이 무렵 임금이 친히 스물여덟 자를 지었다고 적는다. 글자를 만든 마음은 훈민정음 첫머리에 실린 임금의 글, 곧 어제서문(御製序文)에 또렷이 담겨 있다.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어린 백성(어리석은, 곧 글을 모르는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 세종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고 밝힌다.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의 첫 면. 세종의 한문 어제서문을 한글로 풀어 옮긴 '나랏말ㅆㆍ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한다.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의 첫 면. 세종의 한문 어제서문을 한글로 풀어 옮긴 '나랏말ㅆㆍ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한다.
원저 세종 · 촬영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여기서 흔히 어긋나는 통설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세종과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이 함께 만들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기록이 전하는 그림은 좀 더 결이 다르다. 『세종실록』과, 해례본 끝에 붙은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은 세종이 직접 본문 — 곧 글자의 음가와 운용을 밝힌 예의(例義)와 어제서문 — 을 지었다고 적는다. 친제(親制), 즉 임금이 몸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은 그 다음에 온다.

창제가 이루어진 뒤, 정인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여덟 학자가 글자의 제작 원리와 용례를 풀어 쓴 ‘해례(解例, 해설)’를 편찬했다. 즉 창제의 주체(세종)와 해례 편찬의 주체(집현전 8인)는 단계가 다르다. 글자 자체를 만든 일과, 그 글자를 학문적으로 설명한 책을 엮은 일은 구분해야 한다.

게다가 집현전이 한마음으로 이 일을 떠받든 것도 아니다. 1444년에는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를 비롯한 일부 집현전 인사가 오히려 새 글자에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중국과 글을 같이 쓰는 것이 사대(事大)의 도리에 맞고, 새 문자가 학문을 가벼이 만들 것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집현전이 함께 만들었다’는 한 문장으로 뭉뚱그리면, 창제와 해례 편찬의 단계 차이도, 내부의 찬반 갈등도 모두 지워지고 만다. 훈민정음의 탄생은 한 사람의 의지에서 출발해, 일부 학자의 협력과 또 다른 일부의 반대를 함께 거친 사건이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1965). 기록상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親制)한 임금이다.
세종대왕 표준영정(1965). 기록상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親制)한 임금이다.
작자 미상(표준영정 1965)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자음은 어떻게 만들었나 — 입을 본뜨다

이제 해례본이 밝힌 설계 원리로 들어가 보자. 가장 먼저 강조할 것은, 자음과 모음의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흔히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 문장으로 말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다. 발음기관을 본뜬 것은 자음이고, 모음은 전혀 다른 원리를 따랐다. 둘을 뭉뚱그리는 순간 이 문자의 가장 정교한 설계가 흐려진다. 먼저 자음부터다.

자음, 곧 초성(初聲)은 그 소리를 낼 때 입·혀·목구멍이 취하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해례본 제자해(制字解)는 기본이 되는 다섯 글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 —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어금닛소리, 곧 아음(牙音)이다.
  • —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 혓소리, 곧 설음(舌音)이다.
  • — 입의 모양을 본떴다. 입술소리, 곧 순음(脣音)이다.
  • — 이의 모양을 본떴다. 잇소리, 곧 치음(齒音)이다.
  • —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떴다. 목구멍소리, 곧 후음(喉音)이다.

여기까지가 다섯 개의 ‘뿌리 글자’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자음 체계가 천재적인 대목은 그다음에 있다. 소리가 세질수록 획(劃)을 하나씩 더한다는 규칙, 곧 가획(加劃)이다. 같은 자리에서 나는 소리라도 더 거세지면 글자에 획을 보태 그 세기를 눈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그 결과 글자의 모양과 소리의 세기가 나란히 자라난다.

  • ㄱ → ㅋ (아음)
  • ㄴ → ㄷ → ㅌ (설음)
  • ㅁ → ㅂ → ㅍ (순음)
  • ㅅ → ㅈ → ㅊ (치음)
  • ㅇ → ㆆ → ㅎ (후음)

ㄴ보다 ㄷ이, ㄷ보다 ㅌ이 더 센 소리이고, 그만큼 획이 하나씩 더 붙는다. 글자의 생김새 안에 발음의 친족 관계와 세기의 단계가 동시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어떤 글자들이 형제(같은 조음 위치)이고, 그중 누가 더 거센 소리인지를 모양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우연한 디자인이 아니라, 소리를 관찰하고 분류한 음성학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해례본의 제자해(制字解) 부분. 자음과 모음을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 직접 설명한, 세계에 유례없는 문자 창제 해설이다.
해례본의 제자해(制字解) 부분. 자음과 모음을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 직접 설명한, 세계에 유례없는 문자 창제 해설이다.
조선 정부(Government of Joseon)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모음은 어떻게 만들었나 — 하늘과 땅과 사람

모음, 곧 중성(中聲)은 자음과 완전히 다른 원리를 따른다. 발음기관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곧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삼재(三才)를 본떴다. 동아시아의 우주관에서 만물을 이루는 세 바탕으로 여겨진 그 셋이, 그대로 세 개의 기본 모음이 되었다.

  • (아래아) — 둥근 점. 하늘의 둥긂을 본떴다.
  • — 가로획. 땅의 평평함을 본떴다.
  • — 세로획. 사람이 곧게 선 모습을 본떴다.

이 셋을 서로 조합하면 나머지 모음이 만들어진다. 하늘(ㆍ)을 땅(ㅡ) 위아래에, 또는 사람(ㅣ) 좌우에 붙여 ㅗ·ㅏ·ㅜ·ㅓ 같은 글자를 이루고, 다시 점을 둘로 늘려 ㅛ·ㅑ·ㅠ·ㅕ로 뻗는다. 자음이 입 모양의 상형에서 출발해 획을 더하며 자랐다면, 모음은 우주의 세 원소에서 출발해 점과 획의 결합으로 펼쳐진다. 그러니 ‘훈민정음 전체가 발음기관을 본떴다’는 설명은 틀렸다. 발음기관을 본뜬 것은 자음의 다섯 뿌리 글자뿐이고, 모음은 하늘·땅·사람을 본떴다. 두 원리가 한 문자 안에서 짝을 이루며 맞물려 있다는 것 — 이것이 훈민정음 제자(制字) 원리의 핵심이다.

받침은 어떻게 했을까. 여기서 훈민정음은 글자 수를 늘리는 대신 영리한 경제를 택한다.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 곧 종성(받침)은 따로 새 글자를 만들지 않고 이미 만든 초성(자음) 글자를 다시 쓴다는 원칙이다. 초성·중성·종성이 모여 한 음절을 이루되, 종성 자리에는 초성 글자를 그대로 빌려 쓴다. 적은 글자로 가장 많은 소리를 담아내려는 설계 철학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정인지는 서문에서 이 글자가 자연의 이치를 담아 그 응용이 끝없이 넓다고 칭송하며, ‘바람 소리, 학의 울음, 닭의 홰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적을 수 있다’고 적었다. 사람의 말만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소리를 받아 적을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잃을 뻔한 해설서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렇게 정교한 제자 원리가 글로 남아 있었음에도, 정작 그 원리를 적은 책 — 해례본 — 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책이 사라지자 원리도 함께 베일에 싸였다.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은 훈민정음이 대체 무엇을 본떠 만들어졌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옛 한자의 전서(篆書) 글씨체에서 본떴다는 고전(古篆) 기원설을 비롯해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반전은 1940년 무렵에 찾아왔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해례본 한 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곳곳에서 흩어지고 사라지던 시절이었다.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거금을 들여 이 책을 사들여 지켜 냈다. 그가 지켜 낸 이 판본이 오늘날 ‘간송본’으로 불리며,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만약 이 한 권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전란 속에 사라졌다면, 우리는 지금도 훈민정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끝내 알지 못한 채 추측만 거듭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전시된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1446년 간행된 이 해설서가 1940년 발견되면서 비로소 문자 창제의 원리가 세상에 드러났다.
전시된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1446년 간행된 이 해설서가 1940년 발견되면서 비로소 문자 창제의 원리가 세상에 드러났다.
Kbarends (English Wikipedia)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 출처

해례본의 가치는 곧 국가의 인정으로 이어졌다.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올랐다. (한국의 또 다른 세계기록유산인 『직지(直指)』는 2001년 등재로, 시점이 다르다.) 한 권의 책이 발견됨으로써, 흩어져 있던 추측이 가라앉고 자음의 발음기관 상형(象形)과 모음의 천지인 상형이라는 원리가 비로소 확증되었다. 책이 곧 원리의 증거였던 셈이다.

한편 2008년에는 경북 상주에서 또 다른 판본이 발견되었다. 이른바 ‘상주본(尙州本)’이다. 다만 이 판본은 소장자와 국가 사이의 소유권 분쟁에 휘말렸고, 법원은 국가 소유로 판단했으나 아직 반환되지 못한 채 행방이 분명히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자질문자’라는 평가, 그리고 ‘세계 유일’의 정확한 범위

훈민정음의 설계는 현대 언어학자들의 눈길도 끌었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은 1990년 저서 『Writing Systems』에서 한글을 ‘자질문자(featural writing system)’로 분류하며 높이 평가했다. 자질문자란, 글자의 모양이 단순히 소리 하나하나에 대응할 뿐 아니라 그 소리가 지닌 음성적 ‘자질(feature)’까지 형태에 반영하는 문자를 말한다. 앞서 본 가획 — 획을 더해 거센소리를 표시하는 규칙 — 이 바로 그 예다. 소리의 세기라는 자질이 글자 모양의 변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만 이 평가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존 드프랜시스(John DeFrancis)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한글을 자질문자로 보는 분류에 이의를 제기했다. 글자가 실제로 부호화하는 음성 자질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비판이다. 요컨대 학계의 평가는 ‘호평이 주류이되 비판도 병존한다’는 쪽이 정확하다. 훈민정음의 과학성은 분명 두드러지지만, 그것을 단 하나의 절대적 찬사로 못 박는 일은 학문적으로 신중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이 내건 ‘세계 유일’이라는 말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여기서도 범위를 정확히 좁혀야 한다. 흔히 ‘창제자가 알려진 유일한 문자’라는 식의 단정이 회자되지만, 여기에는 학계(김슬옹 등)의 신중론이 있다. 만든 사람이나 만든 시기가 어느 정도 알려진 문자가 역사상 훈민정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방어 가능하고 정확한 차별점은 다음과 같이 한정해 말해야 한다 — 훈민정음은 그 창제 원리(제자 원리)를 밝힌 해설서가 함께 전하는,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에 가까운 문자다. ‘세계 유일’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범위, 곧 ‘글자를 만든 원리가 책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 한정될 때 비로소 정확하다. 글자 자체가 아니라, 글자의 설계도가 함께 전해 내려온다는 것 — 그것이 훈민정음의 진짜 희소성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세종과 훈민정음' 전시. 한글의 창제와 발전을 보여 준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세종과 훈민정음' 전시. 한글의 창제와 발전을 보여 준다.
Republic of Korea (Korea.net) · CC BY-SA 2.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창제와 반포, 그리고 28에서 24로

마지막으로 자주 뒤섞이는 두 해와 두 숫자를 정리하며 맺자.

첫째, 창제(1443)와 반포(1446)는 별개의 사건이다. 세종이 스물여덟 자를 지은 것은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의 일이고, 그 글자를 풀어 설명한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행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의 일이다. 글자를 만든 해와 그것을 책으로 반포한 해 사이에는 약 3년의 시차가 있다.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기리는 것은 바로 이 1446년 반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둘째, 처음 만든 글자는 스물여덟 자다. 초성 17자와 중성 11자로 이루어진 28자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네 글자가 쓰임을 잃었다. ㆍ(아래아)·ㆁ(옛이응)·ㆆ(여린히읗)·ㅿ(반치음)이 그것이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쓰는 글자는 스물네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24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만든 것은 28자였고, 그중 넷이 사라져 지금의 24자에 이른 것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의 한글 전시 공간. 창제 당시 스물여덟 자였던 한글은 오늘날 넉 자가 사라져 스물넉 자로 쓰인다.
국립한글박물관의 한글 전시 공간. 창제 당시 스물여덟 자였던 한글은 오늘날 넉 자가 사라져 스물넉 자로 쓰인다.
Republic of Korea (Korea.net) · CC BY-SA 2.0 · Wikimedia Commons · 출처

그리고 다시 한번,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이름의 문제. 15세기의 이 글자는 ‘훈민정음’ 또는 ‘언문’이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름 ‘한글’은 20세기 초 주시경을 비롯한 학자들의 손에서 비로소 태어났다. ‘하나의 글’, ‘큰 글’, ‘으뜸가는 글’이라는 뜻을 담은 근대의 명명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한글 창제는 세종의 가장 큰 업적으로 기려진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한글 창제는 세종의 가장 큰 업적으로 기려진다.
촬영자 미상 · Wikimedia Commons · CC0 · Wikimedia Commons · 출처

인간의 지성은 때로 세상을 관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관찰을 형태로 빚어낸다. 훈민정음은 입과 혀가 소리를 만드는 모양을 들여다보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우주의 질서를 떠올려, 그것을 스물여덟 개의 단순한 획으로 옮긴 결과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빚어낸 원리를 굳이 한 권의 책으로 적어 남겼다는 점이다. 만든 사람의 마음과 손길, 그리고 그 설계의 논리까지 함께 전해지는 문자 — 그것이 오늘 우리가 날마다 무심히 쓰는 글자의, 결코 무심하지 않은 내력이다. 2014년 서울 용산에 문을 연 국립한글박물관은 바로 그 내력을 지키고 풀어 보이는 자리에 서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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