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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을 거의 모르고 30년을 사는 지하의 쥐 — 벌거숭이두더지쥐가 뒤집는 다섯 가지 상식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절반쯤 차는 작은 설치류가 있다. 털은 거의 없고 피부는 분홍빛에서 황갈빛으로 쭈글쭈글하며, 크고 누런 앞니 두 쌍이 입술 바깥으로 삐죽 나와 있다. 몸길이는 8~10cm, 체중은 30~35g으로 생쥐만 하다. 동아프리카(에티오피아·케냐·소말리아,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의 건조한 초원 지하에 굴을 파고 사는 벌거숭이두더지쥐(Heterocephalus glaber)다. 생김새만 보면 볼품없지만, 이 작은 창조물은 포유류의 상식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뒤집는다.

털 없는 분홍빛 벌거숭이두더지쥐 개체 전신 사진
벌거숭이두더지쥐(Heterocephalus glaber). 털이 거의 없는 분홍빛 주름 피부와, 입술 바깥으로 나온 큰 앞니가 보인다. 몸길이 8~10cm, 체중 30~35g으로 생쥐만 하다(사육 개체).
사진 · Roman Klementschitz,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앞니가 입술 밖에 있는 것부터가 설계다. 입술이 앞니 뒤에서 닫히도록 되어 있어, 흙을 파는 도구로 이빨을 쓰면서도 입 안으로는 흙이 들어오지 않는다. 눈은 거의 흔적기관 수준으로 작아 시력이 약한 대신, 캄캄한 굴 속 생활에 맞춰 수염과 몸의 촉각털에 크게 의존한다. 겉모습 하나하나가 평생을 땅속에서 보내는 삶에 맞춰져 있다.

여왕 한 마리가 다스리는 지하 왕국

첫 번째 놀라움은 사회 구조다. 벌거숭이두더지쥐 군집에서는 오직 한 마리의 여왕(번식 암컷)과 그와 짝을 이루는 수컷 1~3마리만 새끼를 낳는다. 나머지 수십 마리는 번식을 하지 않고, 몸집과 맡은 일에 따라 굴을 파고 먹이를 나르고 군집을 지키는 일꾼 계급을 이룬다. 여왕은 다른 암컷들의 번식을 행동과 호르몬으로 억눌러 자신만이 새끼를 낳는 지위를 유지한다. 군집은 보통 수십 마리에서 평균 약 75~80마리, 많게는 300마리를 넘기도 한다(Sherman 등, 1991).

여러 마리가 뭉쳐 있는 벌거숭이두더지쥐 군집 사진
서로 몸을 맞대고 뭉친 군집.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한 마리 여왕만 번식하고 나머지는 비번식 일꾼 계급을 이루는 진사회성 동물로, 군집은 평균 75~80마리에 이른다.
사진 · BFS Man, CC BY 2.0, Wikimedia Commons

이렇게 한 개체만 번식하고 나머지는 불임 일꾼으로 협력하는 사회 체제를 진사회성(eusociality)이라 부른다. 개미·꿀벌·흰개미 같은 곤충에서는 익숙하지만, 포유류에서는 극히 드물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1981년 제니퍼 자비스(Jennifer Jarvis)가 Science에 포유류 최초의 진사회성 동물로 기술하면서 널리 알려졌다(Jarvis 1981). 다만 흔히 퍼진 ‘유일한 진사회성 포유류’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같은 두더지쥐과(Bathyergidae)의 다마라랜드두더지쥐(Fukomys damarensis)도 여왕 한 마리를 중심으로 한 진사회성 군집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Jarvis & Bennett), 진사회성은 이 과 안에서 적어도 두 번 나타난 셈이다. 그러니 ‘유일’이 아니라 ‘포유류에는 극히 드문’ 사회 체제라고 하는 편이 옳다.

암을 거의 모르는 몸 — ‘늦게’가 아니라 ‘일찍’ 멈추는 세포

두 번째 놀라움은 의학 연구를 뜨겁게 달군 암 저항성이다.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암에 절대 안 걸린다’는 말이 널리 퍼졌지만, 이는 과장이다. 2016년 딜레이니(Delaney) 등은 동물원에서 오래 산 개체(약 20세·22세의 비번식 수컷) 두 마리에서 각각 선암종과 위 신경내분비암종을 처음으로 공식 보고했다(Delaney 등, 2016). 즉 종양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 종양이 극히 드물게만 보고될 만큼 암 저항성이 매우 강한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 저항성의 실마리는 세포가 증식을 멈추는 방식에 있다. 대부분의 세포는 주변이 다른 세포로 빽빽이 들어차면 증식을 멈추는데(접촉저해),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섬유아세포는 훨씬 이른 단계, 즉 세포들이 성기게 닿기만 해도 벌써 증식을 멈추는 ‘조기 접촉저해’를 보인다. 이때 세포 증식을 막는 단백질 p16(INK4a)이 강하게 유도되어, 사람·생쥐와는 다른 이중의 제동 장치가 걸린다(셀루아노프 등, 2009).

조기 접촉저해 도해 — 보통 세포와 벌거숭이두더지쥐 세포 비교
도해: 조기 접촉저해. 보통 세포는 빽빽이 들어차야 증식을 멈추지만(왼쪽), 벌거숭이두더지쥐 세포는 초고분자량 히알루론산(HMW-HA)이 조직을 채워 성기게 닿기만 해도 일찍 증식을 멈춘다(오른쪽). 이것이 강한 암 저항성의 주요 기전으로 제안된다(Seluanov 2009·Tian 2013 기반).
도해 · glu.kr 자체 작성

이 조기 제동을 매개하는 물질로 지목된 것이 초고분자량 히알루론산(HMW-HA)이다. 2013년 티안(Tian) 등은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사람이나 생쥐보다 5배 이상 큰 히알루론산을 세포 밖 공간에 잔뜩 쌓아 둔다는 것을 밝혔다(Tian 등, 2013, Nature). 이 거대한 분자가 조직을 채워 세포가 서로를 일찍 감지하게 만들고, 그 결과 종양으로 자라기 전에 증식을 멈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히알루론산을 분해하거나 만들지 못하게 하면 벌거숭이두더지쥐 세포도 악성으로 변하기 쉬워졌다. 다만 이것이 암 저항성의 유일한 이유로 확정된 것은 아니며, 단백질을 더 정확하게 합성하는 능력 등 여러 기전이 함께 작동하는 것으로 제안되고 있다(아스푸루아 등, 2013).

30년을 살고, 늙어도 위험이 잘 오르지 않는다?

세 번째 놀라움은 수명이다. 사육 기록상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최대 수명은 약 31년에 이른다(AnAge 데이터베이스). 비슷한 체구(약 35g)의 생쥐가 3~4년을 사는 것과 비교하면, 몸 크기로 예측되는 값의 약 다섯 배를 산다. 더 놀라운 주장은 사망 위험의 변화 패턴이다. 2018년 루비(Ruby) 등은 약 3,300마리의 출생·사망 기록을 분석해, 나이가 들어도 하루 사망 위험이 눈에 띄게 오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Ruby 등, 2018, eLife). 나이가 들수록 사망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른다는 곰페르츠(Gompertz) 법칙은 사람을 포함한 대다수 포유류에 잘 들어맞는데,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여기서 벗어나 보인다는 것이다.

나이에 따른 사망 위험 곡선 도해 — 곰페르츠와 벌거숭이두더지쥐 비교
도해: 나이에 따른 사망 위험. 사람·생쥐 등 대다수 포유류는 나이가 들수록 사망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른다(곰페르츠 법칙).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이 곡선이 거의 오르지 않는다는 분석이 제기됐으나(Ruby 2018), 아직 논쟁 중인 주장이다.
도해 · glu.kr 자체 작성

다만 이 대목은 ‘늙지 않는다’, ‘불로’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이 분석은 관찰 기간이 대체로 짧은 개체가 많고(상당수가 8년 이하) 데이터가 특정 시기 출생 개체에 치우쳐 있다는 반론이 뒤따라, 아직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확실한 것은 벌거숭이두더지쥐가 같은 크기의 설치류가 상상하기 어려운 세월을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이고, ‘노화에 따라 사망 위험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아직 검증이 진행 중인 주장이라는 점이다.

산소가 끊겨도 버티는 대사 — 포도당 대신 과당으로

네 번째 놀라움은 숨쉬기에 있다. 환기가 나쁜 지하 굴은 산소가 적고 이산화탄소가 많다. 이런 환경에 맞춰,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산소가 부족해도 좀처럼 죽지 않는다. 2017년 파크(Park) 등의 실험에서, 산소가 전혀 없는 상태(무산소)에서도 이 동물은 약 18분을 뚜렷한 손상 없이 견뎠다(다만 30분 노출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산소를 5%로 낮춘 저산소 대기에서는 최소 5시간을 별 탈 없이 버텼는데, 비교군 생쥐는 같은 조건에서 15분을 넘기지 못하고 질식해 죽었다(Park 등, 2017, Science).

비결은 연료를 바꾸는 데 있다. 보통의 동물은 산소가 없으면 포도당을 분해하다가 그 경로가 스스로 막혀(산성화·되먹임 억제) 곧 한계에 부딪힌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이때 과당(fructose)을 쓰는 혐기성 대사 경로로 갈아탄다. 과당 경로는 포도당 경로를 막는 그 제동에 걸리지 않아, 산소 없이도 에너지를 계속 뽑아낼 수 있다(Park 등, 2017). 원래 과일이 단맛을 내는 데 쓰는 당을, 이 동물은 산소 없는 위기를 넘기는 비상 연료로 돌려 쓰는 셈이다.

산소가 없을 때 과당 대사로 전환하는 흐름 도해
도해: 산소가 끊겼을 때의 연료 교체. 보통 동물은 산소가 없으면 포도당 대사가 스스로 막혀 한계에 부딪히지만, 벌거숭이두더지쥐는 과당(fructose)을 쓰는 경로로 갈아타 그 제동을 우회하고 에너지를 계속 뽑아낸다(Park et al. 2017 기반).
도해 · glu.kr 자체 작성

산도 고추도 아프지 않은, 지하에 맞춘 감각

다섯 번째 놀라움은 통증이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산(acid)과 캡사이신(고추의 매운 성분)에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이산화탄소가 쌓여 산성이 되기 쉬운 굴 환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특성이다. 2008년 파크 등은 이 동물의 피부 감각신경에 통증 신호 전달물질인 물질 P(Substance P)가 빠져 있음을 밝혔다. 물질 P를 유전자로 되돌려 넣자 캡사이신에 대한 통증 반응은 되살아났지만 산에 대한 반응은 그러지 않아, 두 무통각의 기전이 서로 다름이 드러났다(Park 등, 2008). 산에 무감각한 것은 신경세포의 나트륨 통로(NaV1.7)가 종 특이적으로 변형돼, 다른 동물에서는 흥분을 일으키는 산성 신호가 오히려 신경의 발화를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스미스 등, 2011).

주의할 점은, 이것이 ‘고통을 전혀 못 느낀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벌거숭이두더지쥐도 세게 꼬집거나 뜨거운 자극에는 다른 쥐처럼 정상적으로 반응한다. 무감각은 굴 생활과 직결된 특정 자극(산·캡사이신)에 한정된, 정교하게 조율된 무통각이다.

입술 밖으로 나온 앞니가 보이는 벌거숭이두더지쥐 옆모습 사진
입술 바깥으로 나온 큰 앞니. 입술이 앞니 뒤에서 닫히도록 되어 있어, 이빨로 땅을 파도 흙이 입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굴 생활에 맞춰 설계된 구조다(사육 개체).
사진 · Chomez,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체온 조절도 남다르다. 대부분의 포유류가 바깥이 춥든 덥든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과 달리,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체온이 주변 온도를 따라가는 변온동물에 가까운 열동조자다. 굴 속 온도가 대체로 안정적인(약 30~33℃) 덕에 이런 몸으로도 지낼 수 있고, 온도가 떨어지면 서로 몸을 맞대 뭉치거나(huddling) 햇볕에 데워진 얕은 굴로 이동하는 행동으로 체온을 다스린다. 대사율도 비슷한 크기 설치류 중 가장 낮은 축에 들어, 적은 산소와 먹이로 오래 버티는 삶에 맞춰져 있다.

동아프리카 지하의 정교한 생존자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평생을 햇빛 없는 땅속에서, 큰 덩이줄기를 파먹으며 산다. 한 마리가 굴을 파다 큰 덩이줄기를 만나면 군집 전체가 오랫동안 나눠 먹는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은 없지만, 그 몸 안에는 암을 억제하는 세포, 산소 없이 버티는 대사, 특정 통증만 걸러 내는 감각, 그리고 한 마리 여왕을 중심으로 협력하는 사회가 겹겹이 담겨 있다.

먹이를 앞발로 쥐고 먹는 벌거숭이두더지쥐 사진
먹이를 앞발로 쥔 벌거숭이두더지쥐(사육 개체). 야생에서는 동아프리카 지하에서 큰 덩이줄기를 파먹으며, 한 마리가 찾은 큰 덩이줄기를 군집 전체가 나눠 먹는다.
사진 · Ltshears (Trisha M. Shears),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사람의 눈에 ‘못생긴 쥐’로 비치는 이 작은 동물이, 정작 우리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문제들 — 암을 어떻게 막을까, 왜 늙는가, 산소가 끊긴 조직을 어떻게 지킬까 — 앞에서 뜻밖의 스승이 된다. 손바닥만 한 창조물 하나에 이토록 정교한 설계가 여러 겹으로 담겨 있다는 사실은, 창조된 세계를 들여다볼수록 감탄이 깊어진다는 것을 다시 일러 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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